방랑과 가난의 역사 노래와 춤도 잊었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 승인 2008.02.1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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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차별받는 집시들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저들은 원래부터 저 자리에 저렇게 있었다.” 5년 전 슬로바키아의 수도 블라티슬라바 교외에 있는 로마인(집시가 가지는 차별적인 의미 때문에 요즘은 로마인으로 불린다) 거주 지역을 지나면서 그들의 궁핍한 풍경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가이드에게 “저들이 저렇게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어 보았지만 속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에 퍼져 있는 로마인의 수는 약 1천5백만명에 이른다. 로마인은 하나의 민족으로 옛 인도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언어인 로마니(Romany)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옛 인도인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비단 슬로바키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거주하는 로마인들 대다수의 삶은 처참하다. 지난해 유니세프(UNICEF)는 발칸 반도 7개국(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로마인 3백70만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발간했다. 로마인 하면 ‘방랑’과 ‘가난’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듯 조사 내용도 참담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로마인 중 알바니아 거주자의 78%, 루마니아 거주자의 66%가 하루에 우리 돈 4천원도 벌지 못한다. 전체 조사 대상자 중 53%는 “주기적으로 배고픔을 느낀다”라고 답변했다. 많은 수의 로마인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생활을 영위한다는 내용이 뒤를 이었다. 생활 환경도 비위생적이다. 세르비아에 있는 6백여 로마인 거주지 중 절반 이상은 ‘비위생적인 슬럼가’로 구분되었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니세프의 조사에 따르면 세르비아의 경우 전체 로마인 중 13%만이 초등교육을 이수하고 있으며 대학 학위를 받은 로마인은 1%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베틀라나 마르제비치 유니세프 베오그라드 담당자는 현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대부분의 로마인과 로마인 어린이들은 가난에 찌들리고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있다”라며 각국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로마인이 유럽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로마인은 우리와 다르다’라는 차별 때문이다. 로마인에 대한 차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5백년이라는 얘기도 있고 1천년이 넘었다는 추측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로마인들이 차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박해까지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유럽 사람들은 로마인을 ‘더럽고 게으르며 도둑질을 하는 민족’이라고 정형화시키며 하류 인간으로 취급했다. 이런 고정관념이 로마인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 불감증을 갖게 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나치가 로마인에게 2차 세계대전 동안 저지른 만행에서 볼 수 있다.

나치 치하에서 50만명 이상 학살당하기도

흔히 홀로코스트라고 하면 나치가 행한 유대인 집단 학살만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로마인 역시 학살되었다. 로마인 문제 전문가인 하마모토 다카시 교수(일본 간사이 대학)는 자신의 저서인 <집시>에서 ‘로마인들이 나치의 혈통주의에 의해 배척당하면서 강제 노동에 종사당하거나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라고 밝혔다. 다카시 교수가 조사한 자료나 증언에 따르면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로마인 수는 △유고슬라비아 9만명 △루마니아 3만6천명 △소련 3만5천명 △폴란드 3만5천명 △헝가리 2만8천명 △프랑스 1만5천명 △독일 1만5천명 등 총 27만여 명에 달한다. 밝혀지지 않은 사건까지 감안하면 학살당한 로마인의 수는 50만명이 넘는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처럼 유대인의 학살은 재조명되었지만 로마인의 학살은 그렇지 못했다.
로마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최근 헝가리의 사회노동부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명 이상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헝가리 내의 기업 가운데 로마인을 전혀 고용하지 않는 기업이 8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 때부터 로마인을 차별하는 기업이 절반에 이르고 설혹 고용한다고 하더라도 임금, 승진 등 처우에서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 헝가리의 빠른 경제 성장 속도를 감안할 때 일자리는 많을 테지만 결국 로마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육체 노동 아니면 범죄밖에 없는 셈이다.

로마인을 하찮게 보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들을 향한 폭력으로 번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8월 불가리아 경찰은 수도인 소피아의 로마인 거주지에서 칼, 도끼, 삽 등을 들고 사납게 돌아다니는 로마인 4백여 명을 연행했다. 그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이유는 스킨헤드가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하루 동안 2백여 명의 로마인이 카페나 길거리 등지에서 스킨헤드 단체에게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 불가리아 경찰은 “인종 차별로 빚어지는 폭력 사건이 늘어난다는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불가리아 현지 신문들은 “2005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폭동 때와 비슷한 인종 갈등 양상을 띠고 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로마인 문제를 유럽의 주요한 인종 갈등 문제로 보고 있다. 지난 1월31일 유럽위원회는 EU 회원국들에게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EU법을 충실하게 따라달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유럽의회 네덜란드 대표인 코벤호벤 의원은 “유럽위원회는 로마인 문제에 관해서만은 느리게 움직이고 게으른 행태를 보이고 있다”라고 비판하며 전 유럽 차원에서의 논의가 순탄치 않음을 우려했다.

먹고사는 문제 해결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대거 이동 중

결국 차별을 피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으로 로마인은 발칸 반도를 벗어나 점점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미 패션의 도시인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차로 20여 분만 벗어나면 로마인 거주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주요 거주지인 동유럽을 벗어나 서쪽으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차별이 존재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덜한 곳에서 나은 삶을 영위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유럽으로 간다면 사회복지망에 의존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교육을 받아 좀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도 있다는 희망이 이들을 서쪽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게다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지난해 1월1일 EU에 가입하면서 로마인이 유럽 국가들 사이를 이동하는 것도 과거보다 수월해졌다. 로마인 연맹 단체의 수장인 플로린 시오아바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와 내년에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로마인들 수천명이 서쪽으로 이동할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서유럽 사회에 경고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EU는 아직 로마인들의 이동에 대해 준비가 덜 되었다”라고 비판하며 빠른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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