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멜로냐 사회 문제작이냐
  • 김유미 (연극 평론가) ()
  • 승인 2008.04.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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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 2’의 기대주 <블랙버드>, 주연 배우들의 힘이 돋보인다

 

‘연극열전 2’의 기획은 대중적인 작품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배우를 등장시켜 연극을 낯설게 여겼던 관객들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중적 기획 자체를 연극적 순수성의 훼손이라고 여기는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가난한 연극’의 정신이 가장 풍요로운 공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 보자면 잠재적 관객까지 끌어들여 연극에 좀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효과 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그런 관객은 이러한 기획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효과가 미미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앞으로는 이분법적 가치가 해체되는 경향이 더 커질 것이다.

‘상업적 연극/순수한 연극’의 구분이 무의미해질 수는 없지만 양 끝점의 사이에 놓이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담보한 공연들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중극의 개념도 헐거워지면서 연극, 영화, 방송 드라마를 막론하고 좋은 작품에 대한 대중적 선호도는 높아질 것이며 대중의 안목 또한 날카로워질 것이다.

상업과 순수의 이분법적 가치 해체되는 중

요즘 방송 드라마의 수준은 상당하다. 여자들만 눈물 짜면서 보는 안방 드라마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다. <엄마가 뿔났다> <온에어>는 남성 시청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좋은 배우와 대본이 그러한 결과를 만든다. <온에어>에는 얼핏 보기에 연극계의 고민과 상반되는 고민들이 등장한다. 대중성 때문에 작품성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그렇지만 결국 따져보면 같은 고민을 하는 셈이다. 작업 기반이 달라서 고려하는 순서가 다를 뿐, 결국 좋은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는 목표는 같다. 그러므로 ‘연극열전 2’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한 몸부림은 필요하다.

‘연극열전 2’의 기획에 신작 공연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몸부림과 관련될 것이다. 이 중 해외 작품의 초연 무대로 관심을 끄는 작품은 <블랙버드>다. 영국의 젊은 작가 데이비드 해로우어가 쓴 작품으로 2005년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공식 개막작으로 선정되었고 2007년 올리비에 베스트 희곡상을 받은 바 있다. 이는 그만큼 작품이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최근의 괜찮은 작품을 큰 시간 차이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흥분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추상미와 최정우라는 점, 번역을 성수정씨가 맡았다는 점이 신뢰를 더해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연출이 바뀐 것이다. 이영석이라는 신진 연출가의 저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그런 일이 생기면 작품이 잘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연출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대사 위주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작품 해석에만 주력한 느낌이 성의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작품의 무대는 단조롭다. 무대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아동 강간범으로 감옥에서 나온 후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피터로 이름을 바꾼 레이의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전체 사건이 진행된다. 게다가 대사는 많다. 이런 작품은 배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관객들 역시 배우에게 거는 기대가 컸을 것이다. 배우들은 대체적으로 관객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았지만 기대 이상도 아니었다. 추상미는 작은 목소리에 비해 의미 전달이 잘 이루어져 다행이었고, 최정우는 관객에게 안정된 느낌을 전해주었다. 소아 성애자라는 딱지가 붙은 변태의 느낌보다는 중년의 남자가 주는 신뢰감으로 마지막 반전을 살려주었다. 그렇지만 두 인물 모두 복잡다단한 내면이 섬세하게 드러났다기보다는 단순화되었는데 그것이 결말의 해석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마지막 반전 살려준 최정우의 연기

이 반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사회적 문제극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15년 전 중년의 레이를 좋아했던 열두 살 우나가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50대 중반의 레이와 마주한다. 우나가 레이를 좋아했던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끔찍했던 과거에도 여지가 남아 있는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나가 레이를 찾아온 것도 결국 레이가 자신한테 한 행동이 사랑이었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를 증오함으로써 마음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것보다 그녀의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는 더 손쉬운 방법이 된다. 극은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처럼 진행된다. 마지막에 여자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 여자아이가 레이를 대하는 행동은 연인에게 하듯 친근하다. 관객들이 그녀를 본 느낌은 거의 레이가 재범을 저지르는 현장을 잡은 느낌이다. 그 여자아이가 레이의 현재 여자친구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구심은 약간 주춤하게 되지만 결국 레이의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어린 여자에 대한 끌림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평범하고 성실한 남성의 이면에 숨은 야성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레이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도 든다. 소아 성애는 우나가 처음이었고 그 전, 그 후에도 없었노라는 말. 우나는 열두 살로 안 느껴졌고 성숙한 여자 같았다는 말. 그리고 현재의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보호자로서 돌보는 입장이라는 말. 그것은 작품이 꼭 그렇게 말한다기보다는 관객이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욕구에 더 가깝다. 사랑 이야기를 보는 것이 더 마음 편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 자체가 결코 평범한 사랑은 아니지만. 우리의 현실은 매우 잔혹하다. 영화 <추격자>에 나오는 살인자가 멀쩡한 이웃인 것이 몸서리쳐지고 엘리베이터 초등학교 여학생 폭행 사건, 혜진·예슬 양 사건으로 온 국민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결말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지만 그 몫을 즐거이 나누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을 마주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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