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가려다 영원히 가면 ‘느릿느릿’만 못하느니…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10.2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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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이 조명을 받으면서 ‘슬로(Slow)’가 경쟁력의 원천으로 떠오르고 있다. 슬로푸드, 슬로시티, 슬로라이프의 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 유기농 식재로로 만든 '슬로푸드'를 표방한 레스토랑에 고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는 슬로푸드 레스토랑 '느리게 걷기'. ⓒ시사저널 임준선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이 격언처럼 현대인은 시간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더 빨리 말하고, 더 빨리 생각하고, 더 빨리 행동하고, 더 빨리 먹기를 강요당해 ‘빨리빨리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이다. 화장실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는 것도 사실은 이같은 조급증에서 시작되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에 무심코 신문을 집어 드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슬로(Slow)’란 단어가 주목받고 있다. ‘빨리빨리’가 대세인 세상에서 ‘느림’이 경쟁력의 원천으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슬로푸드(Slow Food)’ ‘슬로시티(Slow City)’ ‘슬로라이프(Slow Life)’ ‘슬로무브먼트(Slow Movement)’ ‘슬로어답터(Slow Adopter)’ 등은 생소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다. 

김진세 고려제일신경정신과 원장은 “빨리빨리 증후군이 오히려 업무 성취도를 떨어뜨리고, 공동체 붕괴나 가정 불안을 야기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단순히 빠름을 배격하기보다는 바쁜 일상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풀이된다”라고 진단했다.

‘슬로’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은 지난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식생활 개선 운동이 ‘슬로 캠페인’의 근원으로 알려져 있다. 대량 생산된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입맛을 바로잡고, 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식생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 이 캠페인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슬로푸드’ 운동이라고 지었다.

경기도, 10곳의 슬로푸드 마을 선정해 ‘바른 먹을거리 운동’ 실천

남기정 농협경영연구소 연구위원(농협대학 교수)은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맥도날드나 피자헛과 같은 패스트푸드가 판을 쳤다. 전통 음식 보호를 위해 자구책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 슬로푸드 운동이다”라고 설명했다.
슬로푸드 캠페인은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지난 1989년 파리에서는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여 ‘슬로푸드 선언’을 채택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 프랑스, 스위스, 일본 등 50개 국가에 슬로푸드 운동 지부가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회원이 1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웰빙 붐’을 타고 슬로푸드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7월과 12월 대학로점과 청담점을 잇달아 개설한 슬로푸드 레스토랑 ‘느리게 걷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모델라인이 운영하는 이곳은 차별화된 컨셉트로 ‘슬로푸드’업계의 대표격으로 떠올랐다.

‘느리게 걷기’의 이윤희 마케팅 사업부 과장은 “매일 입고되는 유기농 차와 식재료를 통해 정성껏 시간을 들여 만드는 슬로푸드는 정형화된 패스트푸드와는 차별화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경기도에서도 최근 10곳의 슬로푸드 마을을 선정해 ‘바른 먹을거리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양평군 용문면에 위치한 보릿고개마을의 경우 1960년대의 보릿고개를 테마로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가난했던 시절 허기를 달래주던 꽁보리밥과 호박밥, 개떡 등 추억의 먹을거리를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가평 영양잣마을이나 여주 오감도 도토리마을 역시 현지 재료를 통해 토속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방문객들은 직접 잣을 생산하거나, 도토리묵을 만드는 체험 행사도 즐길 수 있다.

‘슬로푸드’에서 시작된 운동은 지자체나 산업계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특히 ‘슬로시티’의 경우 세계 많은 도시가 인증을 신청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독일 등 12개 국가의 101개 도시(2008년 5월 기준)가 가맹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7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신안군 증도, 완도군 청산도, 장흥군 유치면 등 네 곳이 ‘치타슬로 마을’(슬로시티)로 인증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이다.

▲ '가고 싶은 섬' 선정에 이어 '슬로시티'로 지정된 완도군 청산도의 한 펜션. ⓒ시사저널 임영무

남기정 농협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현재의 농촌 및 도서 지역 개발은 거주민보다는 관광객 편의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 해안가 절벽이나 산을 잘라 도로를 만들고, 주차장을 세움에 따라 운치 있는 경관이나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이렇게 환경 파괴적인 개발을 피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슬로시티의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친환경적인 생활 패턴 만들어…지나친 상술 개입 우려도

슬로시티 운동의 창시자인 파올로 사투르니디가 이탈리아에서 지난 1999년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8년이 지난 후 마을 전체의 수익은 몇십 배 더 늘어났다. 고용률도 급격히 올랐다.

마을 한복판 광장에는 마을에서 나는 흙으로 구운 벽돌을 깔았다. 호텔이 필요하면 건물을 짓는 대신 오래된 마을의 성을 개조해 만들었다. 이로 인해 관광객도 늘어나 주민들의 삶 또한 넉넉해졌다.

슬로시티 운동이 이렇게 곳곳에서 성공을 거둠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상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의 반대 개념인 ‘슬로어답터Slow Adopter)’까지 등장했다. 그동안 IT 소비는 얼리어답터가 주도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치게 복잡한 기능을 피하고, 단순하고 짧은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IT 기기를 선호하는 슬로어답터가 늘어나고 있다.

손민선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마니아적 감성을 가지고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아낌없이 사들이는 얼리어답터식 소비는 주춤하고 있다. 대신 쉽고 단순한 제품이나 서비스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라고 밝혔다.

‘느림’은 이제 삶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슬로’가, 마케팅 용어로 변질되어 인기를 끈 ‘웰빙(well-being)’처럼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한국계 일본인이자 <슬로라이프>의 저자인 쓰지 신이치 씨는 “원래 슬로라이프에는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원의 사랑’과 ‘글로벌에 맞서 로컬을 살리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최근 원뜻에 녹아 있는 ‘뺄셈’의 발상은 빠지고 어느새 다양한 물건과 서비스를 팔기 위한 ‘덧셈의 상술’로 전락하고 있어서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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