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만 있는’ 감독, 누군들 하고 싶으랴
  • 정철우 (이데일리 기자) ()
  • 승인 2008.11.1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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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표팀 감독 선정 놓고 ‘잡음’ 되풀이…기대치에 비해 팀 구성 등 환경은 열악해져 ‘부담’ 가중

▲ 2006년 제1회 WBC 준결승전에서 일본에 석패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3월 개막되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감독 자리를 놓고 야구판이 시끄럽다. 당초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베이징올림픽 우승을 이끈 김경문 두산 감독에게 맡기려 했으나 김감독의 고사로 무산되었다.

이어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룬 김성근 SK 감독에게 권했다가 다시 퇴짜를 맞았다. 결국 기술위원회 만장일치로 김인식 한화 감독을 추대하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 역시 마음 내켜 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감투를 쓰게 된 것이다.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를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는 종목은 아마도 야구가 유일할 것이다. 야구 인생 최고의 영예가 될 수도 있는 자리를 왜 서로 떠넘기려 하는 것일까.

김경문·김성근 고사해 김인식 감독 ‘추대’

돌이켜보면 야구 국가대표 감독은 매번 선정할 때마다 적잖은 잡음이 있었다. 프로에 문호가 개방된 1999년 이후 크고 작은 대표팀이 꾸려졌지만 굵직한 대회를 맡게 된 감독들은 ‘영광’보다는 ‘부담’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특히 성적이 계속 오름세를 그리고 있는 최근 들어 이와 같은 경향은 더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야구는 2006년 제1회 WBC에서 세계 4강 신화를 이루어냈고, 지난 8월에는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까지 따냈다.

내년(2009년) 3월에 열리는 제2회 WBC는 그래서 더욱 어깨가 무겁다. 눈높이와 기대치가 크게 높아진 탓에 성적에 대한 부담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반면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환경은 열악해진 상황이다. 강력한 라이벌 일본은 올림픽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일찌감치 치밀한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이치로(시애틀), 마쓰자카(보스턴) 등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선수들의 대표팀 합류로 전력이 한층 업그레이드될 전망이다.

미국·도미니카·베네수엘라 등 기존 강호들도 메이저리거의 대거 합류가 예정되어 있어 WBC에서는 올림픽 팀의 전력을 훌쩍 뛰어넘게 된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 전력 구성은 그리 녹록한 상황이 아니다. 베이징올림픽 우승 멤버는 건재하지만 해외파의 지원은 자신할 수 없다. 특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박찬호와 추신수는 스프링캠프의 활약에 따라 2009 시즌 입지가 결정될 수 있어 두 선수 모두의 참가는 어려운 상황이다.

KBO가 현역 감독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현역 감독이 국가대표를 맡게 될 경우 소속팀에는 유·무형의 피해가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WBC는 늘 스프링캠프 및 시범경기와 기간이 겹쳐서 치러진다. 물론 감독이 직접 지켜보아야만 선수들의 기량이 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팀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우선 감독에게 돌아간다. 당장 자신의 거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팀 성적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축구의 경우 전임 감독제로 운영된다. 대표팀 감독에게는 고액 연봉과 강한 권력, 그리고 명예가 따라온다. 그러나 야구는 현역 감독을 고집하고 있다. 별도의 보상도 거의 없다. 의무는 줄줄이 따라오는데 권한은 허공에 떠 있다.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다.

▲ 왼쪽은 김성근 SK 감독, 오른쪽은 대표팀 감독에 추대된 김인식 한화 감독. ⓒ연합뉴스

국가대표팀 감독이 부담되는 자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감독 선임에 대한 준비가 더욱 철저해야 한다. KBO가 감독들의 합의 하에 원칙을 정해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맡고 다른 팀 감독들은 코칭스태프로 참가한다’라거나 하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면 굳이 문제될 것도 없다. 키 순서대로 반장을 시키는 학교에서 반장 선거 때문에 문제 생길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니면 전임 감독제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KBO는 지금까지 “현역 감독이 맡아야 대표팀의 기강이 선다”라는 이유로 현역 감독에게 국가대표팀 운영을 맡겨왔다. 간단히 말하면 재야 인사가 맡게 되면 선수들에게 영이 서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비겁한 변명이다. 야구 선수들을 하루아침에 위아래도 없는 무뢰배로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이다.

축구 등에 비해 국제대회가 적은 특성상 전임 감독제 운영이 재정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솔직한 답일 것이다. 

감독 선임에 앞서 KBO가 원칙 정해야

현재 WBC 감독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촌극은 감독직을 고사하고 있는 감독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무원칙에 화살을 돌려야 할 것이다.

김성근 SK 감독은 KBO의 WBC 감독 제안을 고사한 뒤 김인식 감독이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기를 들었다. 김인식 감독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끊은 김성근 감독은 금세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또 내가 모르는 게 있었네…”라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김성근 감독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김인식 감독이 WBC 감독을 부담스러워 한 이유 때문이다.

김인식 감독은 “몸은 괜찮은데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다. 대회 기간 중에는 팬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공식 인터뷰에 나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김성근 감독은 “그런 생각까지는 못해봤는데 괜히 내가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건강이 괜찮아졌다고 해서 1회 대회에서 좋은 성적(4강)을 거둔 김인식 감독이 좋을 것 같다고 했던 것인데…”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KBO의 대표팀 운영에 대한 준비 부족이 엉뚱하게 두 노(老)감독의 마음에 적잖은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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