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옷 갈아입은 구미호의 변신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7.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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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여우누이뎐>, 인간과 애증이 교차하는 대결 구도 그려…“세태 변화 반영한 새로운 해석” 호평

흐릿한 호롱불 아래, 남편과 아내의 평범한 저녁의 일상이 펼쳐진다. 아내는 행복이 충만한 얼굴로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짚을 꼬면서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내를 얻은 자신이 복에 겹다는 표정으로 그윽하게 바라본다. 아마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불현듯 아주 옛날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났던 구미호 이야기를 꺼낸다. 해서는 안 되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카메라는 살짝 남편 뒤쪽으로 가려졌던 아내를 비춘다. 거기에는 조금 전 행복에 겨운 얼굴의 아내는 사라지고, 분노와 한에 서린 구미호가 앉아 있다….

▲ 에서 구미호인 구산댁 역을 연기하는 한은정씨. ⓒKBS 제공

 아마도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보았을 장면, 바로 시간이 흘러도 해마다 반복되어 만들어지는 <구미호>를 대표하는 장면이다. 너무 무서워 한여름인데도 이불 속으로 자꾸만 움츠러들던 그 공포의 기억은 당대를 살았던 분들이라면 누구나 추억의 한 자락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자애로운 얼굴에서 순간 기묘한 분장의 괴물로 변신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떨게 만들었던 그 기억.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변신하는 구미호를 보면서 공포를 느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도 여름철 공포의 시즌이면 어김없이 구미호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섭기보다는 어딘지 정이 가는 이 귀신에 여전히 빠져드는 이유는?

초창기 구미호가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대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이 그 특별한 공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호 캐릭터는 무엇보다 그 변신 능력과 사람의 간을 빼먹는 두려움으로 구성된다. 변신하기 위해 폴짝폴짝 재주를 넘기만 하면 되던 구미호가 왜 사람이 되려 하며, 또 한 인간의 아내가 되려 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전통적인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이다. 따라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람 행세를 하기 위해 긴긴 세월을 참으며 살아가는 구미호의 모습은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억눌려온 우리네 며느리들을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아내로서, 사람으로서 살려 했던 구미호가 결국은 그것을 포기하고(이것은 남편이 저버린 약속 때문이다), 다시 여우로 떠나간다는 설정이다. 이 부분에서 시집살이하던 당대의 며느리들은 공포라는 장르 속에서나마 억압의 탈출을 경험한다. 뒤늦게 떠나간 구미호를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남편의 뒤늦은 후회는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 위해(며느리가 사람 대접을 받기 위해) 겪은 1천년 동안의 힘겨운 시집살이에 대한 소극적인 위안이 된다. 자유로운 한 인간이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아내로의 변신을 강요받고, 또 그 아내가 다시 자유로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이 욕구의 반복은 <구미호>가 가진 핵심적인 재미를 구성한다.


하지만 지금은 2000년대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단면이 고부 갈등으로 표출되던 1970년대가 아니다. 그러니 <구미호>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그래서 일찌감치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돌아서는 구미호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덜컥 아이를 가져버린 이 구미호는 섣불리 아이를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아이가 지내기에 산속은 혹독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미호는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한다. 이로써 모성애 가득한 구미호가 탄생한다. 이 구미호는 인간으로 변신하려는 욕구를 포기한 지 오래고, 다만 아이를 무사히 성장시켜 본래 모습인 여우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갖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 이 이야기 속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역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간을 빼먹는 구미호는 사라지고, 대신 구미호의 간을 빼먹으려는 인간이 탄생한다. 죽을 운명에 처한 딸을 살리려는 인간 윤두수(장현성)는 구미호와 그 딸을 거두지만, 애초 목적은 구미호의 딸인 연이(김유정)의 간이다. 인간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여우로 돌아가려는 구미호와 그것을 막아서며 구미호의 간을 빼먹으려는 인간. 이 도치된 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간결하면서도 강력하다.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는 것.

현대의 서민들이 상류층을 바라보는 ‘선망과 증오’의 시선 담아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 깔린 계급에 대한 정서를 읽을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인간’ ‘인간이지만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인간’이 이 이야기 속에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윤두수라는 양반과 그 집에 기거하는 하인들은 명확히 대비되며, 나이 어린 윤두수의 자제들은 저마다 하인들이나 구미호 모녀에게 패악스런 짓을 태연하게 저지른다. 심지어 우물 속에 연이를 집어던지는 장면과 그럼에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통쾌해하는 초옥(서신애)의 모습은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한편 윤두수는 마치 구미호인 구산댁(한은정)을 사모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는 알 수 없게 그려진다. 윤두수와 구미호는 이 과정에서 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 욕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딸을 살리기 위해 대립하는 존재. 이 애증이 교차하는 대결 구도는 새롭게 해석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현대인들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구미호의 이 시선은 현대의 서민들이 상류층을 바라보는 ‘선망과 증오’가 뒤섞인 시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물론 그런 시선조차도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조장된 것이지만.

‘구미호’로 대변되는 우리의 귀신들을 보면서 무섭기보다는 정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시대에 의해 억압되고 핍박받는 존재들이며, 그 한에 의해 탄생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싶다’라는 소박한 소망을 가진 그 슬픈 존재들은 당대가 갖고 있는 차별과 억압을 그대로 드러낸다. ‘구미호’와 같이 우리네 한을 가진 귀신들이 계속해서 리바이벌되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여전히 이 시대도 저 옛날 조선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차별이 존재하는 시대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바로 이 서민 의식은 우리가, 구미호라는 인간이 되지 못한 반인반수의 존재에 공감하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여름 공포의 시즌이 되면 우리는 귀신의 사연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 놀라운(?) 풍경을 매번 접하게 된다. 

 잔혹한 장면보다 더 무서운 것

<전설의 고향>이 특별했던 것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 드라마는 각 지방마다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전설)를 극화했다. 이 무궁무진한 이야기 소재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데다가, 지방의 연원이나 특색을 담고 있고, 또한 적정한 교훈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콘텐츠로서 그만일 수밖에 없었다.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된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내놔”라는 유행어로 잘 알려진 ‘덕대골’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기본 힘은 공포에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공포물이면서도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한 피와 살점이 튀는 요즘의 공포물들과 비교해보면 <전설의 고향>의 영상은 그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공포감은 직접적인 장면의 잔혹함보다는 간접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의 무서움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한 속에는 저마다 복수의 이유가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스토리가 권선징악의 보편타당한 교훈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이 이야기는 ○○○에서 전해져오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정리 멘트는 <전설의 고향>만의 특별한 공포 이야기가 가진 특징을 잘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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