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고개’ 집권 4년차 증후군
  • 이유주현│한겨레 정치팀 기자 ()
  • 승인 2011.01.1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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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5년 단임제 대통령들, 어김없이 비슷한 시기에 여당과 갈등 노출…‘이듬해 탈당’ 수순도 되풀이

주인공은 바뀌어도 시나리오는 똑같이 반복된다. 권력은 곳곳에서 새고, 한 식구인 여당 내부에서 공개적으로 대통령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인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집권 4년차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되풀이되어온 모습이다. 이후 ‘미래 권력’(차기 대선 주자)에 대한 줄서기가 시작되고, 대통령은 떠밀리다시피 당적을 버린다.

지난 1월10일 한나라당 지도부가 앞장서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의 사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은, 정확히 5년 전인 2006년 1월 당시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소장파들이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 임명에 대해 항의 성명을 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 2006년 2월10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유시민 신임 보건복지부장관의 인사를 받고 있다. ⓒ청와대기자단

2011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정동기’로 골머리를 앓은 것처럼, 2006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유시민’에 걸려 열린우리당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유시민 의원의 입각 가능성은 2005년 말부터 여권 핵심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당내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상 그대로 밀어붙일 것이라며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새해가 시작되는 2006년 1월 벽두에 유의원의 장관 내정을 발표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유시민 입각 반대’를 외치고 나선 배경에는, 유시민 의원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도 있었지만 노 전 대통령이 당의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본래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 직후인 2003년부터 여당의 인사와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제왕적 총재가 되지 않겠다며 당정 분리 공약을 실행하는 데에 나섰다. 당시 당정 분리는 대세이기도 했다. 쇄신 파동 와중에 대통령 후보가 된 바 있던 노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부득이한 측면도 있었지만, 융통성 없게 이를 적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당·청 간 불협화음을 낳았다. 노 전 대통령은 공천이나 당직 인사에 불개입 원칙을 비교적 철저히 준수했으나, 당의 의견을 정책이나 국정 운영에 반영시키는 데 인색한 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금 돌이켜보면 당정 분리가 당과 소통하지 않는 불통 구조를 만들었고 정권이 몰락한 한 요인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이후 열린우리당은 2006년 6월 지방선거 참패라는 직격탄을 맞으며 구심점이 해체되었고, 대통령의 뜻과 달리 옛 민주당과 통합하려는 유력 대선 주자인 정동영 의원 등 여당 내부의 움직임에 반발하며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2월22일 결국 탈당했다.

‘마지막 총재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집권 4년차인 2001년에 당·청 갈등을 피해가지 못했다. 2000년 말 정동영 당시 최고위원 등의 ‘권노갑 최고위원 2선 후퇴’ 발언으로 촉발된 쇄신 운동은 2001년에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안동수 법무부장관의 ‘충성 메모’ 파동을 계기로 민주당 초·재선 의원들은 잇따라 인사 쇄신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며 다시 한번 쇄신의 깃발을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권노갑 최고위원 등 동교동계 측근들이 주로 당·청 갈등의 고리로 작용했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동교동계를 당내 ‘하나회’라고 비판하면서 내부 갈등이 격해지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차는 온통 게이트 정국으로 얼룩지면서 급격한 레임덕을 초래했다. 그해 ‘진승현·정현준·이용호’ 등 이른바 ‘3대 게이트’가 동시 다발적으로 터졌다. 특히 수도권에서 모조리 진 2001년 ‘10·25 재·보선’ 이후에는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위기의식이 짙어지면서 여당 내 소장파들의 쇄신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총재직을 던졌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비리에 연루된 아들 홍업·홍걸 씨 문제로 2002년 5월6일 민주당을 떠나야 했다.


임기 말 ‘자기 사람 챙기기’가 한 요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집권 4년차인 1996년 역시 권력형 비리가 어김없이 불거졌다. 그해 10월 이양호 국방부장관이 연루된 백두사업 비리가 터졌고, 12월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민심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또 이때부터 계속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 대한 뇌물 수수 의혹이 제기되더니 급기야 1997년에 들어서면서 ‘한보 게이트’에 이어 현철씨가 구속되는 상황에 몰리며 국정 운영의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결국 대선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1997년 10월22일 여당인 신한국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김 전 대통령에게 당을 떠나라고 촉구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11월7일 탈당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태우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며 조기 레임덕을 초래한 ‘수서 비리’ 사건은 집권 4년차인 1991년 1월부터 불거져나왔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당과 대립각을 세우더니, 권력 2인자인 김영삼 민자당 대선 후보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 국정 장악력을 상실하다시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9월18일 민자당을 전격 탈당했다. 

이처럼 집권 4년차마다 인사 문제가 불거지거나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지는 까닭은, 임기 말이 다가올수록 대통령은 ‘자신이 알고 자기를 아는 사람’을 요직에 앉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심 측근을 가까이 둘수록, 여권 내부에서는 권력 투쟁 양상을 빚으며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임기가 끝나가는 대통령이 무리수를 둘 때마다 대통령의 눈을 가리는 측근들에 대한 비판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이 정동기 전 민정수석을 감사원장에 앉히려다가 망신을 당한 데 대해 여권 내부에서 임태희 비서실장 인책론을 들고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되지만 의원들은 다음 총선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해관계가 다르다. 표심의 흐름에 민감한 당으로서는 재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 당·청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 ‘정동기 사태’에 대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청와대는 1월26일 예정되었던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새해 만찬도 연기했다. 앞으로 당분간 당·청은 냉각기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 때 대변인을 지낸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임기 말 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민심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열린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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