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바라보는 눈빛이 나라마다 다른 이유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1.06.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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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독특한 몸 사용 매뉴얼을 찾아 떠나는 여행

우리 몸 문화 탐사기 최아룡 지음신인문사 펴냄400쪽│1만6천원

한국 여성들은 왜 미니스커트를 입고 계단을 오를 때 가방 같은 것으로 뒤를 가리는 것일까. 또, 영화상 시상식에 나온 한국 여배우들은 대담한 디자인의 미니드레스를 입고 나와서는 인사를 할 때 하나같이 한 손으로 깊게 파인 가슴을 가리는 것일까.  

우리는 궁금한데, 외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국인이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 남성이 여성의 몸을 이리저리 훔쳐보는 것도 이해 못할 노릇이다. 문화의 상대성 때문이다. 특히 몸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다르다.

유럽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비교 분석한 <우리 몸 문화 탐사기>의 저자는 독일 출신 남성과 함께 가족을 이룬 한국 여성이다. 그녀는 독일과 한국만 두고 보아도 엄청난 문화 차이가 있음을 몸소 느꼈다. 예를 들면 독일의 사우나에서는 남녀가 함께 시설을 사용하면서 아무 거리낌이 없는데, 한국인들은 동성끼리 쓰면서도 타인의 벗은 몸을 ‘구경’하기도 하는 등 알몸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속옷에 대한 편견도 지적했다. 외국인의 눈에 속옷은 안에 입는 옷, 즉 ‘언더웨어(underwear)’이다. 그들에게 속옷은 몸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속옷이 보여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녀 불문 속옷이 보이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왜 그런 것일까.

저자는 이에 대한 분석으로 한복에서 엿볼 수 있는 과거의 전통 문화를 떠올렸다. 한국에는 전통적으로 노출을 꺼리는 문화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성이 몸의 일부뿐만 아니라 속옷이 보여도 ‘칠칠맞지 못한 여성’ ‘단정치 못한 여성’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이 현대에 와서도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어, 노출 본능이라며 미니스커트를 입었어도 허벅지를 볼세라 감추고 무릎을 손수건으로 가리는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가 다른 것처럼 몸을 대하는 각국 사람들의 태도와 사고방식에 커다란 편차가 있다. 저자는 지구촌의 다양한 환경에서 꽃피운 몸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를 이야기하며, 그 다양함을 다양함으로 인정하며 차별 없고 평화로운 공존의 지혜를 모색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만의 독특한 몸 사용법을 분석해 좀 더 많은 한국인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우리의 몸 문화를 제안했다.

어느 나라의 몸 문화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이중성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몸 사용법을 개선한다면 다문화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세계인으로서 행동하는 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살색’이라는 말이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그렇다. 이 책에 따르면 살색은 우리말에 있지도 않은 색이었다. 인종 차별적인 명칭이라 해서 지금은 ‘살구색’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도 우리 잘못이 아니었다. 그 살색은 한국인의 평균적인 피부색을 가리키는 색이 아니었다. 저자는 각국의 어휘를 분석한 결과, 독일 등에서도 ‘Flesh(독일어로는 Fleisch)’라는 단어가 들어가 피부색 또는 살색으로 불러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우리가 살색이라고 불러온 색이 정작 백인들의 평균적인 피부색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만의 독특한 방식에 익숙해져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도 그러리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해버린 탓도 있다. 외국의 다른 몸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몸 문화의 개선점을 알아나가는 일이 더욱 세련된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데서 이 책의 역할이 돋보인다. 


ⓒ박신규 제공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문학평론가’라고 즐겨 자처한다. 하지만 정작 그의 비평가 생활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1970년대에 세운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진보적 문학 논의에 끊임없는 동력원이었던 만큼 숱한 도전과 비판에 시달렸다. 보수주의 지식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1980년대에는 급진적인 이론가들로부터 ‘계급 문제를 무시한 소시민적 이론가’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서 그의 문학 이론은 ‘객관적 진리의 철저한 인식에 더 투철했다’는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면서 재평가되었다.

그런 그가 최근 신작 문학평론집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창비 펴냄)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도 그가 문학평론가임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이유가 드러나 있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인문적 교양의 기본이 일종의 문학 비평적 능력이라 믿고 지금도 그 믿음에 따라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문학’은 좁은 의미의 문예물이 아니라 동서양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그랬듯이 좋은 글들을 두루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비평’은 그런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이웃들에게 말하는 작업이다. 읽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과 의견을 나누고 하는 일들은 사람들이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백교수는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은 문학하는 사람에게는 긴요하다고 말했다. 신실하게 문학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런데도 그 물음이 중단될 가능성은 많고 실제로 중단되는 일이 너무도 흔하다. ‘문학이 무엇이다’라고 정답을 임의로 설정해서 더 이상 묻기를 끝내버리거나, 작품을 실제로 읽고 생각하는 작업을 소홀히 함으로써 묻기를 저버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백교수는 최근 한국 문학이 사회 상황과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문학적으로도 큰 사건에 직면해도 문학인들은 일반 시민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평론가들은 자기 부류에서만 읽히는 글쓰기로 자족하고 작가들조차 그런 평론에 언급되기 위해 작품을 쓰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민중의 현실과 시대 상황에 맞물려 ‘문학’이 전개되어야 하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백교수의 문학과 삶에 대한 자세는 ‘멈추지 않는, 깨어 있음’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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