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만 있고 여의도는 없다
  • 감명국 기자·양정대│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3.09.04 11:0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반기 ‘공안 정국’에 ‘정치 실종’ 장기화될 듯

‘정치 실종’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여의도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다. 아예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대신 시청 앞이 시끄러웠다. 이제 그 시선은 시청 앞과 광화문을 지나 세종로로 향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 1번지는 청와대다.

지난 8월5일 청와대 인사가 단행되자 여의도에서는 여기저기서 탄식과 근심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무래도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권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나 보다”라는 게 그것이었다. 야당 쪽의 불만이 훨씬 강했지만, 여당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새 정무수석이 박준우 전 대사라니…. 대화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라고 황당해하며 “그쪽(언론 쪽) 반응은 어떤가”라고 기자에게 되묻기도 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 대통령의 뜻은) 한마디로, 너희들(국회)과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통보 아니겠나. 정무수석은 내 말을 국회에 전달만 하면 됐지, 대화는 무슨 놈의 대화냐는 뜻인 것이다. 그러니까 외교관 출신을 정무수석으로 앉힌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8월8일 청와대에서 김기춘 신임 비서실장(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기춘 비서실장과 홍경식 민정수석의 발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더 컸다. “공안 정국이 시작될 것”이란 전망이 그것이었다. 대표적인 공안 검사 출신인 두 사람의 이력을 빗댄 것이다. 김 실장은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대공수사국장과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지냈다. 1989년 서경원 평민당 의원 방북 사건을 수사하며 당시 공안 정국을 주도했다. 홍 수석 역시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대검 공안부장을 지낸 정통 ‘공안통’이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남재준 국정원장과 더불어 이들 3인방이 향후 공안 정국으로 분위기를 몰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다. 당시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과 개성공단 폐쇄 장기화가 초미의 관심사이던 때다.

“김기춘·홍경식·남재준, 공안 정국 주도할 것”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이러한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하지만 발화의 진원지는 대화록도, 개성공단도 아니었다. 현역 야당 국회의원이었다. 8월28일 국정원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관계자 등 10명의 자택과 사무실 18곳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그리고 30일 이 의원에게 내란 음모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국정원이 다시 한 번 정국의 한복판에 서게 된 셈이다.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혐의’ 수사는 그야말로 정국 현안을 모두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실제 여야 간 극한 대치를 불러오고 국회를 파행으로 몰아간 국정원의 대선 불법 개입 의혹은 물론이고, 상법 개정안을 필두로 한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도, 각종 복지 공약 축소와 세제 및 전기 요금 개편안 논란도 일순간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가을이 되면 여의도 바람은 다른 데보다 찬데, 이번엔 추석도 지나기 전에 삭풍(朔風)이 불기 시작한 것”이라는 한 민주당 핵심 당직자의 말처럼 남재준 국정원장이 휘두르는 칼이 지금 당장은 이 의원 등 통합진보당 핵심 인사들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은 메가톤급 ‘공안 태풍’이 몰아치면서 청와대의 일방통행과 여의도 정치의 실종으로 이어질 것이란 예상도 이어졌다.

정치권, 특히 야권에선 블랙홀을 만들어낸 주체가 다름 아닌 국정원이라는 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선 불법 개입 의혹과 그에 따른 개혁 요구로 코너에 몰렸던 국정원이 회심의 반격을 가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게다가 그 강도가 기존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기고 있다. 공안 사건은 대체로 혐의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비공개 수사를 벌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엔 현역 국회의원을 지목하며 이례적으로 중간 단계에서 공개수사로 전환했다는 점에서다. 검찰 출신의 한 새누리당 의원조차 “적잖이 놀랐다”고 했을 정도다.

이는 ‘왜 하필 이 시점에’라는 의문과 맞물려 있다. 법원으로부터 감청영장까지 발부받아 3년여 간 치밀하게 내사를 벌여왔다고는 하지만 국정원 대북심리전단의 댓글 활동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불법 유출 등의 논란으로 거센 개혁 요구를 받는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여의도 주변에선 ‘정치 실종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미 새누리당은 ‘통합진보당=종북당’이란 프레임을 기정사실화하는 모습이다. 검찰 출신인 김진태 의원은 “종북·좌파들이 국회에서까지 활개를 치고 있다는 그간의 의구심이 확인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게다가 새누리당의 화살은 민주당으로까지 향하기 시작했다. 이인제 의원은 “민주당의 ‘묻지 마 야권 연대’ 때문에 내란 음모 세력이 국회에 들어온 것 아니냐”며 민주당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른바 ‘이석기 사태’로 민주당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는 분위기다. 그동안 대여 강경 투쟁을 전면에 내걸었던 기조에도 일정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민주당이 지금껏 박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김한길 대표와 박 대통령의 단독 회담을 주장해온 기저에는 국정원 개혁 요구를 관철시키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 수사의 주체가 국정원이고 특히 국내 파트가 직접적인 당사자라는 점에서 당장 국정원 개혁 요구에 대한 수위와 방식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민주당은 이번 사태의 영향권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8월30일 통합진보당이 여는 촛불 집회 불참을 선언한 게 단적인 예다. 통합진보당이 이번 수사를 ‘촛불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규정하며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과 관련한 촛불 집회의 수위를 높이려 하자 민주당도 종북 논란에 휘말릴 걸 우려한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사정도 자리 잡고 있다는 후문이다. 사정 당국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는 촛불 집회를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 지난 MB(이명박) 정권이 촛불 때문에 흔들렸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집회 참가자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해온 것으로 안다. 그 결과 겉으로는 민주당이 현장에 천막 당사까지 치며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조직 동원은 통합진보당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정보가 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127석의 거대 야당 민주당이 6석의 통합진보당에 얹혀 가고 있다는 시각이 이석기 사태와 맞물리면서 민주당도 혼돈에 빠져든 것이다.

진퇴양난 민주당, 이석기 사태에 ‘선 긋기’

‘이석기 사태’에 대한 민주당의 공식 입장도 초기의 “현 사태를 엄중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유보적인 입장에서 점차 통합진보당과는 선을 긋는 쪽으로 바뀌었다. 김한길 대표는 8월29일 의원 워크숍에서 “사실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충격적 사건이자 또 하나의 국기 문란”이라며 “철저한 수사가 있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사실 민주당으로서는 ‘통합진보당 트라우마’가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과 적극적인 야권 연대를 이뤘지만, 통합진보당 내부의 비례대표 부정 경선 의혹이 불거지면서 종북 논란에 휘말려야 했다. 특히 대선 때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바람에 오히려 부동층의 표심을 빼앗기는 역풍을 맞기도 했다.

장외투쟁의 출구를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출구로 상정했던 청와대 단독 회담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게 중론이다. 박 대통령이 이미 5자 회동을 재차 언급한 데 이어 이번 사태로 청와대가 적극 나설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정원 개혁 요구를 핵심에 놓은 민주당이 현 시점에서 청와대에 이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어려워졌다. 추석 연휴를 감안할 때 다소의 부담을 무릅쓰고 정기국회 초반은 등원을 미룬다지만, 그 이후라고 해서 뚜렷한 해법을 찾기도 쉽지 않은 처지다. 김 대표의 한 핵심 측근 의원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통합진보당과의 거리 두기는 불가피하지만 이는 결국 국정원 개혁 요구 자체의 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어 고민이다. 정기국회 참여 여부도 새누리당이 나서서 퇴로를 열어주면 모를까, 아무런 소득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들어갈 수도 없는 일 아니냐”고 우려를 표시했다.

결국 이번 사태로 인해 올 하반기는 경색 국면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의도된 ‘공안 드라이브’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여야 정치권이 정국을 주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박 대통령이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가장 큰 변수”라고 말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아예 올 하반기를 ‘공안 정국’으로 규정한 뒤 “새누리당이 무기력증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당분간 박 대통령의 ‘나 홀로 정치’만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8월1일 서울광장에 설치된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에서 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총회를 마친 김한길 대표(맨 왼쪽)가 전병헌 원내대표(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문재인 민주당 의원. ⓒ 시사저널 박은숙·연합뉴스
‘공안 날개’ 단 박 대통령의 ‘나 홀로 독주’

실제로 박 대통령의 독주 가능성은 진작부터 예견돼왔다. 집권 첫해라고는 하지만 그간 새누리당은 청와대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권 출신 한 친박계 의원은 “솔직히 당 지도부가 의원들을 ‘졸(卒)’로 만들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 등 대선 공약이 정부 부처들에 의해 변질될 때 이렇다 할 만한 항변조차 못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여야 간 대치 국면에서 새누리당의 역할이 급속히 위축된 것이 단적인 예다.

새누리당 내에선 조심스레 불만과 위기감이 고조되는 기류도 감지된다. 한 비박계 재선 의원은 “국정원이 별 근거도 없이 이런 엄청난 사태를 초래하진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새누리당의 입지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혐의가 입증되면 정국 경색이 심화되면서 청와대에 끌려가야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역풍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한 비례대표 의원이 최경환 원내대표에게 “우리가 거수기냐”고 항변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반면 청와대는 한결 느긋한 입장이 됐다. 무엇보다 집권 후 6개월간의 밀월 관계 이후 터져 나올 비판 여론의 수위가 낮아질 공산이 커졌고, 야권의 반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형국이다. 남북 관계를 필두로 한 외교안보 분야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국정 운영 동력도 웬만큼 확보한 상태다. 이런 사정은 “당분간 정치의 영역에서 청와대만 보일 것”(새누리당 영남권 재선 의원)이란 전망으로 이어진다. 이번 사태를 두고 청와대와 국정원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거나 최소한 사전 보고를 통해 인지했을 것이란 추론이 나오는 이유다. 신율 교수는 “민심과의 접촉면이 넓고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한 여의도 정치가 위축되는 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이런 때일수록 박 대통령이 여야 정치권과의 소통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