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과 탁신의 힘 약발 떨어졌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4.02.1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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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친탁신파 vs 반탁신파, 권력 공백기 헤게모니 다툼

태국에서 여행업에 종사하는 로자 한사가 시사저널에 전한 방콕의 풍경은 이렇다. “이전의 사태들과 비교하면 격렬한 충돌은 적은 편이다. 시위대나 진압하는 경찰 쪽 모두 상당히 자제하는 모습이다.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는 방콕 시내의 경우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2010년의 소동을 통해 얻은 점들이 있어서 그런지 모두들 조심하는 눈치다.”

이전보다는 절제하고 있다지만 태국의 이상향인 ‘므앙’은 조금씩 붕괴되고 있다. 국왕을 중심으로 한 므앙(도시국가 또는 공국)은 태국인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를 뜻한다. 그동안 태국의 정치적 격변기 때는 매번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존재가 위안이 되었다. 국왕은 위기 때마다 므앙을 지탱하며 태국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왔다.

그런데 이런 므앙은 지난해 말부터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미소의 나라’로 불리는 태국은 2006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탁신 정권이 물러난 이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친(親)탁신파인 ‘레드셔츠’와 반(反)탁신파인 ‘옐로셔츠’의 충돌은 8년째 진행 중이다.

2014년 1월19일 얼굴을 가린 태국 반정부 시위 참가자. ⓒ AP 연합
농민 지원책 줄어들며 탁신 영향력 감소

2011년 7월 치러진 총선에서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푸어타이 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탁신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번 위기의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해 11월1일 통과된 하나의 법안이다. 태국 하원이 부정부패 혐의로 실형 판결을 받고 해외에 망명 중인 탁신 전 총리를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법안을 수정 통과시키자 탁신 반대파가 들고 일어났다. 상원에서 부결되며 결국 없던 일이 되었지만 탁신의 사면을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정부 운동 세력이 결집했고 수도 방콕의 중심부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

시위대의 거센 압력에 밀려 잉락 총리는 지난해 12월9일 하원을 해산하고 지난 2월2일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최대 야당인 민주당은 “2일 총선거가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다고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며 총선을 보이콧했다. 보이콧만으로 무던하게 넘어간 것도 아니다. 반정부 시위대의 일부는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간선도로를 막는 등 투표권 침해 활동을 벌였다. 투표 방해 활동만이 부각되고 결과는 사라져버린, 승자 없는 선거의 뒷맛만 씁쓸하게 남았다.

태국의 시위 구도를 놓고 친탁신파와 반탁신파, 레드셔츠와 옐로셔츠, 농촌 빈곤층과 도시 중산층의 대결로 보는 시각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이런 분석 틀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8년간 대결을 이끌며 간극을 좁히지 못한 두 세력은 태국 정치 불안정의 주축이다. 하지만 태국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지금 시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약해지고 있는 탁신과 국왕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그동안 탁신의 힘은 북동부 이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로부터 나왔다. 농민들의 지지에 대해 탁신은 각종 지원책으로 보상해왔다. 방콕에서 빈민층 구제 활동을 하고 있는 솜암납은 탁신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그의 공과는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탁신이 실책도 많았지만 저렴한 의료 제도와 촌락 기금, 농민들의 부채 감축 등 빈곤층을 위해 펼쳤던 정책, 그리고 군이나 경찰이 개입했던 마약과의 전쟁은 평가받아야 한다.” 

탁신의 혈육인 잉락 총리 역시 같은 기조를 이어갔다. 잉락의 농민 구제 공약 핵심은 ‘쌀 보조금 정책’이다. 2011년 푸어타이 당의 압승 이면에는 잉락 정부가 약속한 쌀 보조금 정책이 있었다. 정부가 시장가보다 50%나 높은 가격에 농민들의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이 정책에 농민들은 열광했다. 지금 태국은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이자 쌀 저장국이다. 잉락 정부는 고가로 매수한 쌀을 저장해왔는데 그 양만 약 2000만톤에 육박한다.

문제는 언제까지 농가에 쌀 보조금을 지불할 수 있느냐다.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온다. 잉락 정부 초기에 재무장관을 지냈던 티라차이 푸와낫나라발라는 최근 “잉락 정부는 당장 포퓰리즘 정책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 투자를 자극하고 세수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은 태국 정부에 쌀 보조금 제도를 중지하도록 권고했는데 잉락 정부가 2011년에 도입한 이 제도에 의한 손실액은 도입 첫해에만 44억6000만 달러(약 4조8000억원)에 달했다. 이대로 보조금 제도를 지속하면 손실은 더욱 확대돼 재정 건전성에 구멍이 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농민의 지원책이 줄어들거나 없어진다는 것은 곧 탁신의 유산과 영향력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농민들이 보기에는 배신이나 다름없다. ‘방콕포스트’의 한 기자는 “지원책에 익숙해진 농민들이 지지층에서 이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국왕의 “연대” 호소에도 시위 계속돼

그동안 위기 때마다 손수 나서 사태를 정리했던 푸미폰 국왕은 이번에도 86세 노구를 이끌고 나섰다. 국왕은 지난해 12월5일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국민들과 마주했다. 대립을 계속하고 있는 국민을 향해 국왕은 연대를 호소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단결해왔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왔습니다.”

누구라고 분명히 말하진 않았지만 국왕이 말을 건넨 대상은 반정부 시위대였다. 국왕의 한마디를 가슴 깊이 새기는 태국인들이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좀 달랐던 것 같다. 태국 미디어가 전하는 반정부 시위대의 반응은 이랬다. “국왕을 사랑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나쁜 정치를 쓰러뜨리고 태국을 평화로운 나라로 만들고 싶다.”

국왕이 사태 해결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레드셔츠와 옐로셔츠의 대결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 국왕이 직접 나섰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거와 달라진 양상이다. 국왕은 등장했지만 이번만은 므앙을 지탱할 힘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동안 국가적 위기 때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하 바치라롱콘 왕세자(62)는 이번 사태를 두고 친탁신파를 동정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트 푸미폰 시대를 대비해 태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정치적 수사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약해진 탁신과 약해진 국왕. 이번 태국 사태가 장기화하는 모습을 방콕에서 바라보고 있는 니브 라셀 글로벌사우스 애널리스트의 시각은 그래서 흥미롭다. “친탁신파와 반탁신파가 모두 앞으로 있을 권력 공백기를 대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체제를 만들기 위해 대치하는 것 같다.”

ⓒ AP 연합·EPA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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