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금기된 성’에 도전하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2.1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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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성 윤리 조사’로 시작된 개혁 “교리와 신도의 성 의식에 큰 간극”

지난해 10월 교황청은 전 세계 로마가톨릭교 교구를 대상으로 결혼과 가족, 파트너십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올해 10월 ‘가정에 대한 성서와 성서의 가르침 확산’이라는 주제로 열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총회를 위한 준비 작업이다. 교황청은 각 나라의 주교회의로 설문지를 전송하면서 “교구와 각 지역 교회에 가능한 한 널리 배포해줄 것”을 당부했다. 사제나 교직자보다는 일반 평신도들의 가족과 성 윤리 실태를 파악하려는 의도에서다.

이 설문조사는 교황청의 ‘풀뿌리 성 윤리 조사’로 알려지면서 주목받았다. 로마 교황청 소속 매체인 ‘바티칸뉴스’는 “교황청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앞서 주교들에게 지역 교회의 현실을 묻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었지만, 의견 수렴 대상을 교구와 본당으로까지 확대한 것은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동안 혼전 순결, 피임과 임신중절, 동성애 등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온 가톨릭교회가 새 교황 프란치스코를 맞이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2월12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주간 일반 알현 행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 AP 연합
한국, “조사 일정 촉박” 이유로 설문조사 거부

그러나 교황청의 의도는 많은 나라에서 좌절됐다. 폴란드 주교회의는 조사 대상을 사제 및 일부 선택된 신도로 제한하고 응답 내용은 비공개로 해 교황청에 전달했다. 심지어 바티칸을 품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이 설문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양친의 고향인 이탈리아 아스티 교구 주교는 ‘슈피겔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교황청의 방침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신도들의 성 윤리는) 굳이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한국에 있는 12개 교구 중에서는 지역 교회에 설문지를 보낸 곳이 단 한 곳도 없을 정도다. 표면상 이유는 한 달 남짓한 설문조사 일정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교인들의 성 윤리가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을 가톨릭이 꺼린다는 점이다. 여러 국가의 주교회의가 성 윤리 문제를 토론 없이 덮고 넘어가려 한다는 ‘의심’은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등 성에 대해 개방적으로 토론하는 서유럽 국가를 보면 ‘확신’으로 바뀐다. 이들 세 나라에서는 4주가량의 짧은 기간 동안 온·오프라인을 통해 수만 명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렇게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는 인터넷에 공개됐고, 가톨릭교회의 성 윤리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이들 나라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 교조주의적이고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슈피겔 온라인)고 여겨지는 가톨릭의 성 윤리 실태를 파악하고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지난해 11월18일부터 12월6일까지 불과 20여 일 만에 총 9292명의 청년 평신도들이 독일가톨릭청년연맹(BDKJ)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설문에 응했다. 조사가 종료된 지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12월18일, 독일가톨릭청년회는 보도자료를 하나 배포했는데 제목은 이랬다. ‘교회의 성 윤리는 청년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이 보도자료에서 독일가톨릭청년연맹의 디어크 탠츨러 대표는 “교리와 청년 신도의 일상생활 간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다”고 설명했다. 응답자의 대다수가 성서에서 혼전 순결을 가르치고 교황청이 피임을 금지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미혼 남녀의 성관계나 피임은 연애 관계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자료는 한 20세 청년의 응답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응답자의 3분의 1가량이 교회가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이 청년은 사제가 자동차에 축성을 내리는 행위를 꼬집어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가톨릭인들 간의 결합도 생애공동체로서 축복받아야 한다. 자동차에 축성을 내릴 수 있다면 다른 형태의 사랑에도 축복을 내리고 주님의 가호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성애를 지금과 같이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 응답자의 비율은 0.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비단 온라인 조사에 참여한 젊은 평신도들만의 추세는 아니다. 보수적 기독교 전통이 강한 바이에른 주 교구가 실시한 조사에서도 교회의 성 윤리는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드러났다. 바이에른 주 가톨릭교회 가족연합에 따르면 신도의 69%가 교회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있으며, 교황이 피임을 금지시켰음에도 86%가 피임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답했다.

“교황, 바티칸 원로들에게 공개 결투 신청”

이러한 신도들의 요구는 새 교황의 개혁 의지와도 부합한다. 지난해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가’로 불린다. 그는 교황 선거를 위해 모인 추기경들 앞에서 “교회는 스스로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부름을 받고 있다”고 선언할 정도로 교회 개혁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지난해 7월에는 “동성애자라 할지라도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심판하겠는가”라는 관용적인 발언을 해 큰 화제를 모았다. 9월에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잡지인 ‘라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바티칸의 원로들에 대한 공개 결투 신청”이라고 표현했다. 12월에는 관용 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미국의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이 주교 선거단에서 퇴출됐는데 이를 두고 “교황의 개혁 의지가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바티칸 원로들의 반발은 뒤로 제쳐두더라도 프란치스코 교황, 그 자신의 성 윤리 개혁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화제가 된 인터뷰 기사에서도 그는 “낙태, 동성 결혼, 피임법 문제에만 천착할 수 없다. 이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교회의 아들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끝없이 계속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성 윤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교회와 세속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겠다는 뉘앙스가 담겼다.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였던 여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인식이다. 그는 “여성이 사도나 주교들보다 중요하다”고 치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성이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는) 문은 닫혔다”고 단언했다. 동성애자와 여성을 배척하지는 않겠지만 제도적 개혁을 통해 이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지도 않겠다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성 윤리 개혁 의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척도가 있다. 가톨릭 사제들이 저지른 아동 성폭력 사건의 처리 방식이다. 독일에서는 지난 2010년 베를린의 카니시우스 기숙학교에서 1970~80년대에 최소 200명 이상의 아동이 조직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극에 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취임 직후 아동 성폭력 문제를 자신의 임기 동안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꼽은 바 있다.

그러나 유엔 아동권리위원회(UNCRC)는 2월5일 “가톨릭교회가 아동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UNCRC는 보고서를 통해 “교황청이 수십 년 동안 아동 성폭력 피해 규모와 가해자를 밝히지 않았고, 가해자들을 퇴출하는 대신 다른 교구나 교회로 보내 계속해서 아동과 접촉할 수 있게 방치했다”며 교황청이 유엔 아동인권헌장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청은 이에 대해 “유엔이 인간의 존엄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간섭을 시도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교황청은 2017년까지 UNCRC의 권고안을 시행하고 보고서를 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제때 제출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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