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바라보다 ‘배신의 상처’ 깊어졌다
  • 엄민우·조유빈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4.03.2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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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앞두고 존폐 기로, 진보정당의 힘겨운 생존전략

“그동안 (정의당이) 안철수 위원장 측과 분위기가 좋았던 건 사실이다. 남들이 보면 연애하는 게 아닌지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잘 사귀어보려고 하던 차에 상대방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냉랭하게 나오면 기분이 어떻겠나. 딱 그런 심정이다.” 정의당의 한 당직자는 민주당과 안철수 위원장이 이끄는 새정치연합 간의 통합에 대한 심경을 묻는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실망감 섞인 이 한마디는 진보정당이 처한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정치의 꽃은 ‘선거’다. 선거를 앞둔 정당은 마치 잔치를 준비하는 부엌처럼 분주하고 활기찬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다. 새누리당은 경선을 앞두고 내부 경쟁을 하느라 바쁘고 새정치민주연합도 선거 전 창당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양측 모두 여론조사 결과를 주시하며 분주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70여 일 앞둔 시점에 진보정당들은 승리를 점치기는커녕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유권자들이 모르는 실정이다. 정의당은 야권 통합이나 연대 테이블에 아예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원내 제3당으로서 선거마다 주요 변수 역할을 하던 통합진보당(진보당)은 당의 존립 여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지방선거가 진보정당에는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닌 진보정치의 현주소와 미래를 가늠케 하는 잔인한 심판대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민주와 평화를 위한 국민동행’ 창립대회에서 묵념하는 김한길 대표, 천호선 대표, 안철수 의원(왼쪽부터). ⓒ 연합뉴스
안철수-김한길 통합에 대한 엇갈린 시선

3월2일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운영위원장의 전격적인 통합 신당 발표로 휴일 여의도가 발칵 뒤집어졌다. 같은 날 오후 3시 정의당은 당 지도부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원래부터 원칙도 없었던 안철수식 새 정치의 종언을 고한 날”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심상정 원내대표도 “안철수의 새 정치가 무릎을 꿇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하루가 지난 3월3일, 국회 본청 217호에서 열린 54차 정의당 상무위에서는 전날과 조금 다른 발언이 나왔다. 여전히 천 대표는 “변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하다. 안철수 현상은 아예 없었던 것만도 못하게 됐다”며 각을 세웠다. 하지만 심 원내대표는 “안철수 위원장의 결정이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면서도 “야권이 힘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통합 선언이 지방선거 야권 승리라는 성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통합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왜 하루 만에 온도차가 큰 발언이 나오게 된 것일까. 당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첫날 격앙된 발언이 나온 후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현실적인 고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창당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새정치민주연합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안철수 위원장과 김한길 대표의 창당 선언 직후 정의당 지도부와 의원들은 상당히 분개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상은 민주당이 아니라 ‘사전 통보’도 없이 민주당과 손잡은 안철수 진영이었다. 정의당과 안 위원장 측은 그동안 ‘연애 기류’였다. 지난해 말 정의당과 안 위원장은 민주당과 함께 국가기관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특검 법안을 발의했다. 이후 민주당은 국정원 개혁 특위에 합의하며 사실상 빠졌다. 당시 시민단체 그룹도 협상 테이블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이후 민주당과는 선을 그었지만 정의당 및 안철수 진영과는 계속 정책 연대가 가능할 걸로 본 것으로 전해진다.

‘양당 체제 타파’ ‘정의로운 대한민국’ 등 새정치연합과 정의당 측이 내놓는 이상이나 가치는 여러 면에서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또 정의당엔 있지만 안 위원장에겐 없는 ‘조직’, 안 위원장에겐 있지만 정의당엔 없는 ‘대중성’이 보완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 정의당 내부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정의당 안팎에서는 혹시 ‘심상정과 안철수 사이에 뭔가 오가는 것 아닌가’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안 위원장은 민주당을 선택했다. 그것도 정의당과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창당 선언 초기에 정의당에서 격앙된 반응을 내놓았던 배경에는 이에 따른 섭섭함이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2월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왼쪽)와 안철수 의원. ⓒ 시사저널 박은숙
심상정 “신당 경기도지사 후보 지원할 수도”

진짜 문제는 선거를 70여 일 앞둔 지금부터다.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진보정당이 선거 때 ‘승리자’였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늘 선거의 주요 변수로서 야권 승리나 여권 심판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지역별로 야권 연대를 이뤄 실속을 챙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새정치민주연합과 함께하기 힘들 것이란 이야기는 거의 정설이 되고 있다. 정의당 한 당직자의 말이다. “최근 창당 과정에서 민주당의 한 의원이 안철수 위원장에게 ‘정의당도 함께 가자’고 했더니 바로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중도 색채가 강한 안 위원장 측에서 정의당이 들어와 좌파적 성격의 세력이 커지는 데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정의당은 서울과 경기 지역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 이 같은 결정은 다른 지역 후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각 지역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정의당 후보들은 지난 3월10일 천호선 대표가 서울·경기 지역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한 직후 “서울·경기가 핵심인데 후보를 안 낸다면 다른 지역도 출마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문의 전화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편 인천에서는 서울·경기 지역과 달리 시장 후보를 낼 예정이다. 김성진 인천시당위원장이 출마 선언을 한 상태다. 당 내부에서는 서울·경기는 양보하면서 왜 인천은 후보를 내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송영길 시장과 새누리당 유정복 후보가 박빙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성진 예비후보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송 시장 측과 연대할 뜻이 없음을 밝힌 바 있다.

정의당은 전국적으로 후보를 내진 않겠지만 경기도 과천 등 경쟁력 있는 지역에 후보를 내고 오는 4월까지 선대위를 발족할 계획이다. 정의당의 이정미 대변인은 “서울·경기에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지금의 야권 후보들이 정권심판과 정치혁신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혁신에 대한 국민적 요구도 있어 선거를 앞두고 무조건 정치공학적인 연대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과 경기 지역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당 내부와 지지 세력 일각에서는 실망과 걱정이 교차한다.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그나마 서울·경기 지역은 정의당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포기해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야권 통합이나 정책 연대를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창당 과정에서 그나마 정의당에 기회가 될 법한 요소도 보인다. 통합되는 신당의 색깔이 중도 우파적 성격을 띠면서 이에 실망한 진보적 지지층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다. 하지만 이것도 거대 야당 창당 과정에 종속돼 있는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선거 때까지 남은 기간은 70일 남짓이다. 그 안에 야권 연대를 이뤄 지금의 양자 구도 선거에 낄 수 있을지가 정의당의 미래를 점치는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심상정 원내대표가 3월20일 “새정치민주연합의 경기도지사 후보를 지원할 수도 있다”고 한 발언이 사뭇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통합진보당 해산 및 정당활동정지 가처분신청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3차 변론에 참석한 이정희 대표(가운데). ⓒ 시사저널 임준선
통합진보당(진보당)은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다. 진보당은 지방선거에 앞서 정당 해산 심판 4차 변론(4월1일)을 앞두고 있다. 말 그대로 당의 존폐를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진보당은 우선 살아남는 게 최우선 과제다. 때문에 각 지역 후보들도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등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선거를 제대로 준비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어수선한 와중에 진보당이 지방선거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진보 진영 정치권 인사는 “진보당은 (만약 당이 해산될 경우) 지방으로 내려가 때를 기다린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들었다. 당이 없어지더라도 새로운 정강으로 당을 세우면 되는 것이다. 당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만큼 선거에 집중하기 쉽지 않아 멀리 내다보고 움직일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진보당은 이 같은 관측을 뒤로하고 정태흥 예비후보가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지는 등 이번 선거에서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을 합쳐 1000명의 후보를 낸다는 계획이다. 진보당의 한 인사는 “만약 해산 결정이 날 경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의원들이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할 것이다. 일단 두 자리의 정당 지지율을 달성한다면 성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얼마 전까지는 선거 전인 5월께 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이 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이 연루된 서울시 간첩 증거 조작 의혹이 이슈화되면서 헌법재판소도 섣불리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정의당의 한 인사는 “유우성 간첩 사건 등 국정원의 증거 조작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헌재가 정당 해산 심판을 하기엔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 입장에서도 진보당 해산 심판이 선거 이후에 나오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선거 전에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조직이 살아 있는 진보당은 여전히 선거판에서 변수를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한때 민주노동당에 몸담았던 한 시민사회계 인사는 “진보당은 모든 선거구에 후보를 내기로 했고 여러 진보 단체들도 선거 때에 맞춰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다. (진보당은) 당선 여부를 떠나 다른 누군가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고 전했다. 진보당에서 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 인사는 “야권 표가 갈리는 게 새누리당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여당도) 섣불리 (헌재에) 빠른 심판을 재촉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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