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총리 명함 가져도 2인자는 ‘기춘대원군’
  • 조해수·엄민우 기자·양정대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4.05.28 15: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춘 실장-안대희 총리 후보자 관계 정국 핵으로 부상

“김기춘 실장은요?” 5월22일 오후,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청와대 인사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거취에 대해 물었다.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고 국가개조 수준의 혁신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청와대의 차기 국무총리 인선 발표가 있었으나, 정작 총리 인선은 야당의 관심 밖인 듯했다. 행정부의 2인자인 국무총리보다 장관급인 청와대 비서실장의 존재감이 더 컸던 것이다. 

“남재준 경질로 김기춘 사퇴 논란 피해”

야당이 이번 인사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차기 총리 인선 못지않게 남재준 국정원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사퇴가 동시에 발표됐다는 점이다. 특히 남 원장의 사표 수리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김장수 실장의 사퇴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직접 책임을 물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남 원장의 경우는 세월호 참사와 직접 관련이 없다. 오히려 남 원장은 세월호 참사로 ‘덕’을 본 경우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의혹 사건으로 사퇴 압박에 몰려 있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전날인 4월15일 국무회의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터지면서 이 사건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났고, 남 원장 사퇴도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5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김기춘 비서실장이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남 원장의 사퇴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국정 쇄신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길을 택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읍참마속을 할 요량이었으면 남 원장보다 김기춘 실장을 해임하는 것이 맞다. 박 대통령에 대한 세월호 참사 지연 보고, 청와대의 컨트롤타워 역할 미흡이라는 책임에서 김 실장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일각에서 “남 원장을 경질함으로써 김 실장의 사퇴 논란을 피해 가고자 한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새누리당 ‘친박(親박근혜)’ 핵심 인사는 김 실장의 존재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안대희 파워 견제할 사람은 김 실장뿐”

“김 실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는 상상 이상이다. 박 대통령은 최근 정국을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잘못된 조언 하나가 자신을 벼랑 아래로 밀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쉽게 조언을 할 수 있겠는가. 친박 실세로 언론에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도 실상은 박 대통령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김 실장만이 가능하다. 물론 남 원장도 김 실장과 함께 박 대통령의 오른팔·왼팔로 상징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내줘야 한다면, 결국 오른팔을 위해 왼팔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남재준 원장과 김장수 실장, 정홍원 총리까지 박근혜정부를 떠나면서 김기춘 실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원로급은 더 이상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 안팎에서는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김 실장을 견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안 후보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안 후보자에게는 ‘강골’ ‘대쪽’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안 후보자가 국무총리에 지명되면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회창 전 총리다. 이 전 총리는 대법관을 거쳐 김영삼(YS) 정부에서 총리로 발탁됐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민감한 국정 현안에 대해 YS와 각을 세우면서 순식간에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안 후보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안 후보자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당시 박근혜 후보와 마찰을 겪으면서도 소신 행보를 펼쳤다. 국회 법사위원회 소속의 한 야당 의원은 “박근혜정부가 세월호 정국을 조기 수습하기 위해 안대희 카드를 꺼내든 것 같다. 그러나 안 후보자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박 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박근혜정부에 자칫 안 후보자는 ‘독이 든 성배’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특히 안 후보자는 김 실장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검찰 출신이지만 김 실장은 공안통의 대부 격, 안 후보자는 특수통의 상징적 인물로 통한다. 그럼에도 안 후보자가 김 실장과 맞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애초부터 안 후보자가 차기 총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김 실장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여당 핵심 관계자는 “차기 총리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인물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조무제 전 대법관, 안대희 전 대법관 등 3인이다. 이 중 검사 출신은 안 전 대법관이 유일하다. 김 실장이 안 전 대법관을 밀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 후보자가 김 실장과 각을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안 후보자를 놓고 이회창 전 총리를 거론하는데 섣부른 판단이다. 안 후보자가 정치에 꿈이 있다면 당내 세력화가 우선 돼야 한다. 이런 기반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안 후보자는 오히려 김황식 전 총리의 실패를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내 세력화는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안 후보자가 큰 꿈을 꾸고 있다면 청와대와 갈등을 빚는 일은 생각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차기 총리 인선이 발표된 5월22일, 한 검찰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기춘 실장과 안대희 후보자를 두고 특수-공안 갈등을 얘기하는데 이는 뭘 모르는 얘기다. 특수-공안을 논하기에 앞서 김 실장과 안 후보자는 기수를 따지기도 힘든 까마득한 선후배 관계다. 특히 예전 검찰에서는 상명하복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이번 청와대 인사 발표는 차기 국무총리에만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다.” 안대희 후보자의 등장 못지않게 김기춘 실장의 유임에 강한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 6·4 지방선거 정국에서 당분간 김기춘 실장의 유임 논란이 커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당장 새정치연합을 비롯한 야권은 “구중궁궐 내부의 친위 체제는 그대로 두겠다는 건가”라면서 “김 실장을 교체하지 않는 인적 쇄신은 의미가 없다”고 못 박았다. 김 실장의 유임이 국정 운영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여권에서는 흥미로운 해석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국가개조 프로젝트’를 안 후보자에게 맡기면서도 최소한의 견제 장치를 남겨뒀다는 것이다. 한 친박계 핵심 의원의 말이다. “박 대통령의 의중대로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 총리가 안전은 물론 인사 행정까지 총괄하게 된다. 박 대통령이 굳이 힘을 실어주지 않더라도 안 후보자에게 파워가 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권 내에서 이를 실질적으로 견제할 만한 사람은 김 실장뿐이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맨 오른쪽)가 5월23일 신임 총리 후보자로 안대희 전 대법관이 지명된 것과 관련해, “국민을 위한 인선이 아니고, ‘왕(王) 실장’을 위한 인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대희 임명 vs 김기춘 유임, 표심은?

박 대통령이 ‘국가개조 프로젝트’를 안 후보자에게 맡기면서도 최소한의 견제 장치로 김 실장을 유임시켰다는 해석이다. 특히 김 실장과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에게 주어질 모종의 역할을 언급하는 걸 보면 박 대통령이 국정 운영 기조를 바꿀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안 후보자를 지명하면서 김기춘 실장은 유임시킴에 따라 인적 쇄신에 대한 여야 간의 대립각은 분명해졌다. 박 대통령이 추구하는 인적 쇄신이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는 데는 ‘안대희 임명’에 대한 여당의 호응과 ‘김기춘 유임’에 대한 야권의 비판 가운데 유권자들이 어느 쪽에 마음을 여느냐가 핵심이다. 사실 여권 입장에선 ‘국민 검사’로 불렸던 안 후보자를 지명한 것이 지방선거 전략 측면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국가개조의 적임자”라는 청와대의 설명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의 수세 국면 탈피 의지가 읽힌다. 여기에 김장수 안보실장과 남재준 원장을 전격 경질한 것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털고 갈 것은 털고 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을 비롯한 야권이 주목하는 인적 쇄신의 내용은 오히려 김기춘 비서실장을 유임시킨 대목이다. 국정 운영 기조는 바꾸지 않은 채 당장의 비판 여론만 피하려는 꼼수라고 보는 것인데, 인적 쇄신의 ‘약한 고리’를 김 실장 유임에서 찾은 셈이다. 유권자들이 안대희 총리 후보자 지명의 긍정적인 의미에 무게를 둘 경우 여권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수세 국면을 탈피해 정국 주도권 확보에 나설 수 있을 전망이다. 새누리당 선대위 핵심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이후 분노한 민심을 추스르지 못하면 지방선거는 해보나 마나일 것”이라며 “박 대통령의 인적 쇄신 노력이 평가를 받는 게 우선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반면 김 실장의 유임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될 경우 여권의 인적 쇄신 노력은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내각은 물론 청와대 참모진 개편에 대한 요구가 비등했던 만큼 김 비서실장 유임은 박 대통령의 불통·독선 이미지를 오히려 굳히는 계기가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인적 쇄신에 대한 평가는 국정 운영 기조의 변화 여부와 맞물려 있다”며 “이 점에서 보면 총리 후보자 지명과 김 실장 유임에 대한 평가도 후임 국정원장 및 개각 인사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