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이 ‘청영방송’으로 전락했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5.2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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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 언론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냈다. 속출하는 오보, 희생자 가족을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 보도에 언론의 신뢰는 땅에 추락했다. 급기야 ‘KBS 사태’를 계기로 정권의 방송 장악 의혹까지 불거졌다. 한국 언론에 불어닥친 세월호 참사의 후폭풍을 조명했다.

 

이쯤 되면 ‘KBS 나비효과’라 할 만하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 논란에서 ‘날갯짓’을 시작한 KBS 사태가 일약 ‘폭풍우’가 돼 정국을 강타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항의방문, 막내 기수들로부터 시작된 ‘반성문’ 쓰기, 보도국 부장단의 일괄 보직 사퇴, 그리고 사임한 김 전 국장의 연이은 보도 개입 폭로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건들이 숨 가쁘게 돌출했다. 그 결과 박근혜정부의 방송 장악 의혹이 대대적으로 불거지기에 이르렀다.

5월21일 KBS 기자협회 회원들이 KBS 신관 앞 계단에서 길환영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갖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보도 개입 의혹의 중심에 선 길환영 사장은 KBS 구성원들로부터 거세게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KBS 기자들이 무기한 제작 거부에 돌입하면서 뉴스 제작은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사장에 대한 임면 제청권을 가진 KBS 이사회는 5월26일 열리는 임시이사회에 길 사장에 대한 해임 제청안을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길 사장은 5월23일 오후 6시 현재까지 버티고 있다. 5월21일 KBS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담화에서 김시곤 전 국장의 폭로가 “과장·왜곡된 일방적 주장”이라며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자신이 연루된 청와대의 보도 개입 의혹을 김 전 국장과의 진실게임 양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번 KBS 사태의 본질은 길환영 사장을 매개로 한 정권 차원의 보도 통제가 있었는지 여부다. 방송법 제4조는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한다. 관련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규제나 간섭을 할 수 없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영방송 KBS의 경우 더욱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강할 수밖에 없다. 김 전 국장의 폭로가 파장을 낳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이를 침해했다는 것을 의심할 만한 정황이 다수 드러났다. 양측의 진실 공방 및 이에 대한 청와대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팩트’들을 중심으로 청와대의 KBS 보도 통제 및 인사 개입 의혹을 추적했다.

김시곤 전 국장 “청와대로부터 전화 받았다”

김시곤 전 국장은 정치 분야 보도에서 박근혜 대통령 비판이 전혀 없는 등 외부 개입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특히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정치 분야 보도에 보도국 외부의 개입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청와대 측의 연락도 포함된다는 뜻이다. 다만 “그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 수용·거부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보도 책임자와 경영진의 몫이라는 것이다. 청와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연락을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길환영 사장 쪽에 보도 개입의 책임을 지운 셈이다.

그렇다면 청와대 측의 ‘루트’는 어디였을까. 김 전 국장은 세월호 참사 보도와 관련해 청와대에서 주로 누가 연락했는지에 대해 답변하는 과정에서 “대(對)언론 역할을 맡은 자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 사람이 이정현 홍보수석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침묵했다. 이에 대해서는 정홍원 국무총리가 ‘사실’을 확인해줬다. 정 총리는 지난 5월21일 국회 긴급 현안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보도를 하고 잠수사들의 사기가 중요했기 때문에 (보도가) 도움이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 경로(이정현 홍보수석)를 통해서 이야기를 했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협조 요청’ 차원에 불과했다고 선을 그었다. “이렇게 저렇게 보도하라고 하면 문제지만 현재 이런 것이 필요하니 참작해달라고 협조 요청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할 공영방송 보도국이 지속적으로 관련 전화를 받은 것은 사실상 외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정 총리를 향해 “요청은 했지만 지시는 아니었다는 얘기인가. 일선에서는 압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방송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반박했다. 정치 분야 보도와 관련해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아왔다는 김 전 국장의 폭로를 고려하면, 이것이 단순히 세월호 참사 보도에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즉 정권의 의중이 청와대 홍보라인을 타고 지속적으로 공영방송 보도국 책임자에게 전달돼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김시곤 전 국장은 “길환영 사장은 청와대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고 언급하면서, 길 사장이 청와대의 의중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며 보도에 개입해왔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지난 5월18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보도 외압 일지’를 KBS 기자협회를 통해 공개했다. 5월3일부터 8일까지 총 4차례에 걸쳐 길환영 사장이 보도에 직접 개입한 구체적 내용을 자세히 적은 문건이다. 한편 길 사장은 5월21일 담화에서 “구체적으로 아이템 취재 지시를 하거나, 기사를 빼라, 리포트 내용을 바꿔라, 한 번도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었다. 청와대 외압설(도 마찬가지로), 기사 관련해서 그런 전화 받은 적 한 번도 없다”며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청와대 출입기자 인사 개입 의혹

청와대는 KBS의 보도를 넘어 인사에까지 입김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사임과 새 보도국장 지명을 전후로 청와대가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의심되는 정황이 다수 포착됐기 때문이다. 내부 인사는 KBS 경영진 고유의 권한이다. 정권이 이를 좌지우지하는 것 역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인식된다.

김시곤 전 국장은 길환영 사장이 5월9일 “BH(청와대)의 뜻”이라며 눈물로 자신의 사직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이 사람이 과연 언론기관의 수장이고 이곳이 과연 언론기관인지 자괴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날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이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보고 KBS 측에 최대한 노력해줄 것을 부탁했고, 그 결과로서 보도국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졌다. 청와대가 KBS 내부 인사에 개입했음을 시인한 것이라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후임 보도국장으로 지명된 백운기 시사제작국장이 보도국장 임명 직전 청와대 인사와 접촉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KBS 노동조합은 KBS 내부 배차기록부를 근거로 제시하며 백 국장이 청와대 인근 카페에서 한 시간가량 청와대 인사와 접촉한 뒤 5시쯤 회사로 돌아왔고, 길 사장은 곧바로 부사장 등을 불러 신임 보도국장에 백 국장을 기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주장했다. 백 국장이 이정현 홍보수석과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의혹을 키웠다. 결국 길 사장은 약 일주일 만에 결정을 철회했다. 5월20일자로 박상현 해설위원실장을 신임 보도국장으로 인사 발령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길 사장은 “오비이락 격으로 삼청동에서 누구를 만났다고 하는 게 노조를 통해서 알려졌지만, 이는 백 국장 인사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다. 청와대 지시로 인사를 한 적은 단연코 없다”고 해명했다.

박근혜정부 들어 정권 차원의 KBS 인사 개입 의혹이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 특정 인사가 이화섭 당시 보도본부장에게 특정 기자를 청와대 출입기자로 발령 낼 것을 요구했다는 풍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본부장이 거부하자 사장과 불화가 시작돼 보도본부장직을 그만둬야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시곤 전 국장은 “인사 문제는 대상자가 있어서 말할 수 없다”면서도 “당시 보도국장, 본부장까지 보도본부에 있는 간부들은 다 그 의견에 반대했다”며 청와대 측의 인사 개입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시민사회, 정권의 방송 통제 검찰 수사 요구

내부 인사가 예민한 문제인 탓에 KBS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김 전 국장이 “다 그 의견에 반대했다”며 거론한 보도본부 소속 간부들이 보직 사퇴라는 초강수로 길 사장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을 고려할 때, 관련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에 대해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관계자는 “청와대 측에서 요구한 특정 기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청와대가 KBS의 독립성을 침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KBS 일각에서는 “김시곤 전 국장 폭로 빼고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지 않나. 김 전 국장과 길 사장의 진흙탕 싸움만 거듭되다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들을 검토해보면, 청와대의 KBS 통제 의혹은 김 전 국장의 폭로를 핵심 근거로 한다. 하지만 김 전 국장의 폭로 중 특히 보도와 관련해 청와대의 ‘적극 개입’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김 전 국장의 폭로는 길환영 사장의 보도 개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KBS 기자협회는 자체 진상조사단을 꾸려 청와대의 KBS 통제 의혹을 추적하고 있다. 하지만 의혹의 뿌리까지 접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KBS 기자협회 관계자는 “통화 내역을 직접 조회해보지 않는 이상, 현재로서는 길환영 사장과 청와대 사이의 ‘핫라인’ 등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정 당국의 수사 없이는 의혹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10개 언론·법률·시민단체들은 5월22일 길환영 KBS 사장,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박준우 정무수석비서관, 이정현 홍보수석비서관 등 4명을 방송법 위반 및 직권 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이완기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대표는 “정권의 방송 통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명확한 증거가 드러난 만큼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며 검찰의 수사를 촉구했다. 세월호 참사 불공정 보도의 후폭풍이 KBS를 넘어 청와대까지 미치고 있다.  

 

KBS 부장단까지 “이대론 안 된다” 


이번 KBS 사태에서는 보도본부 부장단 등 주요 간부들이 대거 길환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고 나선 점이 이채롭다. 보도본부 부장들은 이른바 ‘데스크’로 보도국의 안정적인 운영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전원 보직 사퇴를 선언하는 한편 기자협회 제작 거부를 지지하는 등 ‘길환영 체제’ 흔들기에 적극 동참하는 모양새다.

사실 현장 기자들과 부장들은 평소 그리 원만한 관계가 아니라고 전해진다. 취재 및 보도 과정에서 ‘벽’을 느낄 정도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일부 기자들은 부장들 또한 KBS의 공정 보도를 저해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에서는 유례없는 ‘단결투쟁’에 돌입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20년 차 경력의 한 고참급 기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엄청나다는 방증”이라고 전했다. “지금 부장들은 경력이 23~24년 된 이들로, 일반 언론사에선 편집국장급이다. 그런 이들이 ‘앞으로는 아무리 우리가 진실을 얘기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자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국민에게 사죄하고 길환영 사장을 퇴진시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5월21일 오후 열린 KBS 기자협회 결의대회에는 부장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조재익 사회1부장은 “이곳에 같이 앉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정권의) 조정과 개입이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데 자괴감을 느낀다”며 길 사장의 사퇴를 거듭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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