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니까 결국 터졌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1.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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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감독 ‘믿음의 축구’ 빛 발휘, 손흥민 골사냥 시작해

울리 슈틸리케 감독과 태극전사가 호주에서 아시아 정상을 향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2015 AFC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 개최국 호주마저 꺾으며 3전 전승으로 A조 1위를 차지한 한국은 8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연장 접전 끝에 2-0으로 누르고 4강에 올랐다. 2007년, 2011년에 이어 세 대회 연속 4강 진출로 아시아의 빅4 중 하나임을 다시 증명했다.

특히 전력의 핵인 이청용과 구자철이 부상으로 조기에 대회를 마감하며 전열에서 이탈했음에도 4경기에서 단 1점도 허용하지 않는 성과를 냈다는 점이 주목받는다. 슈틸리케 감독의 믿음의 축구가 부임 5개월 만에 남반구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슈틸리케의 과감한 도박이 대박으로

1960년 제2회 대회 이후 아시안컵 결승에 한 차례도 오르지 못한 한국은 지난 브라질월드컵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각오로 호주에 들어갔다. 특히 월드컵의 핵심 멤버였던 기성용·손흥민·이청용·구자철 등의 각오가 남달랐다.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며 거센 질타를 받았던 이들은 아시안컵에서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복병’ 오만과의 첫 경기에서 한국은 슈틸리케 감독이 추구하는 높은 볼 점유율에 의한 경기 장악을 보여주며 1-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승리의 대가가 너무 컸다. 측면 공격의 핵 이청용이 후반전 도중 상대 선수의 거친 태클에 정강이를 다치고 김창수·조영철도 근육 부상을 입었다. 빗속에서 경기를 뛴 구자철·손흥민·김진현은 감기몸살까지 걸렸다. 2011년에 큰 부상을 입은 바 있는 정강이 부위에 실금이 간 이청용은 결국 대회를 마감하고 귀국했다.

1월22일 호주 멜버른 렉탱귤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AFC 아시안컵 8강전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손흥민이 연장 후반 두 번째 골을 성공시키고 있다. ⓒ 연합뉴스
여기서 슈틸리케 감독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몸이 좋지 않은 선수를 모두 뺀 채 쿠웨이트와의 2차전에 돌입한 것이다. 5명의 선수를 아예 출전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18명으로 경기에 나섰다. 선발 라인업은 무려 7명이나 바뀌었다. 당연히 경기 내용이 좋을 리 없었다. 쿠웨이트의 거센 공격에 고전했지만 남태희의 헤딩골이 터지며 힘겹게 1-0 승리를 거뒀다. 쿠웨이트전에 대해 슈틸리케 감독과 선수들의 경기력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슈틸리케 감독은 “컨디션이 최소한 90% 이상 올라오지 않으면 투입하지 않겠다. 우리는 더 멀리 보고 가야 한다”며 선수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

호주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한국은 조 2위가 유력해 보였다. 호주는 오만·쿠웨이트를 상대로 8골이나 터뜨리는 놀라운 공격력을 보였고 홈 팬의 응원까지 누리고 있었다. 브리즈번에서 열린 호주전에는 5만에 가까운 팬들이 경기장을 채웠다. 그중 4만5000명가량이 호주 홈 팬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컨디션을 되찾은 구자철·김진현을 선발로 내세우고 베테랑 곽태휘를 투입하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최전방에는 ‘신예’ 이정협을 과감히 세웠는데 결국 여기서 승부가 났다. 전반 32분 이근호의 패스를 이정협이 몸을 던지며 밀어 넣어 결승골을 만든 것이다. 이후 60분 동안 한국은 호주의 파상 공세를 강력한 수비와 김진현의 선방 쇼로 버텨냈다. 3경기 연속 1-0 승리를 거두자 팬들은 그제야 “상대가 거세게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과 같다”며 ‘늪 축구’라는 표현으로 슈틸리케호의 경기력을 재평가했다. 한편 이 경기에서 슈틸리케 감독은 구자철마저 잃게 됐다. 후반 공중 볼 경합을 하고 착지하는 과정에서 팔꿈치를 다친 구자철은 인대 파열로 이청용에 이어 짐을 쌌다.

“이런 정신력 가진 선수 본 적 없다”

멜버른으로 이동해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을 앞둔 대표팀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팀의 핵심 선수가 2명이나 빠졌지만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주장 기성용은 “부상을 입은 두 선수의 몫까지 해서 반드시 우승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슈틸리케 감독도 “한국의 가장 큰 힘은 정신력이다. 지금까지 이런 정신력을 가진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모두가 헌신할 준비가 돼 있다. 그들을 믿는다”고 말해 호주전에 이은 또  한 번의 승리를 자신했다. 우즈베키스탄전을 위해 슈틸리케 감독이 꺼내든 비장의 무기는 손흥민이었다. 감기몸살로 쿠웨이트전을 결장한 손흥민은 호주전에 교체 투입됐지만 제몫을 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하루 전 기자회견에 손흥민을 대동하고 나타나 그의 선발 투입을 예고했다. 선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강력한 동기부여를 이끌어낸 것이다.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전 이후 A매치에서 10경기째 골이 없던 손흥민은 슬럼프에 빠진 듯 우즈베키스탄전에서도 헤맸다. 전반과 후반에 수차례 기회가 왔지만 템포 조절 실패와 볼 컨트롤 실수로 놓쳤다. 그런 손흥민을 구한 것은 동료들이었다. 연장 전반 14분 김진수가 왼쪽 측면을 파고들어 페널티박스 안에서 크로스를 올려줬고 이것이 문전에 있던 손흥민에게 연결됐다. 손흥민은 몸을 던져 헤딩슛을 날렸고 공은 우즈베키스탄 골키퍼 네스테로프의 손을 맞고 간신히 골라인을 넘어가 골이 됐다. 1992년생 동갑내기로 U-17 대표팀부터 동고동락했던 김진수와 손흥민의 멋진 합작품이었다. 손흥민은 연장 후반 14분에 다시 골을 터뜨렸다. 차두리가 폭풍 같은 질주로 우즈베키스탄의 측면을 무너뜨렸고 그가 열어준 패스를 받은 손흥민은 노마크 찬스에서 강력한 슛으로 골망을 다시 갈랐다. 차두리는 손흥민이 멘토이자 맏형처럼 따르는 선수다. 결국 동료들의 지원이 골 침묵에 빠졌던 손흥민을 구했다. 전·후반의 부진으로 손흥민의 교체를 고려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그를 믿은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이 탁월했다.

현재 대표팀은 맏형인 차두리와 곽태휘부터 막내인 손흥민과 김진수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 조별리그에서 시작된 위기가 오히려 팀을 더 강하게 만들었고 극복 의지를 키웠다. 내부 경쟁은 팀을 더 단단하게 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조별리그에서 골키퍼 정성룡을 제외한 22명을 모두 기용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선수가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믿음 속에 준비를 했다. 가장 경쟁이 치열했던 골키퍼 포지션에서는 김승규·정성룡을 이기며 주전을 차지한 김진현의 활약이 눈에 띈다. 김진현은 매 경기 선방 쇼를 펼치며 골문을 굳게 잠그고 있다. 베테랑 곽태휘도 후배인 김영권·김주영·장현수와의 경쟁을 통해 그라운드 위에서 압도적인 제공권과 끈적한 일대일 수비로 팀 안정에 한몫을 하고 있다. 주장 기성용은 한 단계 위의 경기력과 강한 책임감을 보여주며 이번 대회를 통해 재평가받고 있다. 2013년의 SNS 파문으로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았다.

4강에 오른 한국은 2경기만 더 승리하면 55년을 기다린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다. 1월26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펼쳐지는 4강전에서 승리하면 31일 같은 장소에서 결승전을 치른다. 55년간 우승은 물론 결승에도 오르지 못했던 한국 축구의 비원 달성을 위해선 숙적과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4강전 상대는 이란을 꺾은 이라크다. 우리가 결승전에 간다면 상대는 호주와 UAE의 대결에서 이긴 팀이 된다. 긴 시간 한국 축구의 라이벌로서 치열한 경쟁을 이어온 이란·일본을 넘어서야 반세기만의 우승이 가능하다. 슈틸리케 감독의 믿음축구가 우승이란 목표까지 달려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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