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 사건’ 어두운 기억 되살아난다
  • 이호재 인턴기자 ()
  • 승인 2015.02.0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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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 의한 폭행 치사 사고…수사 과정에서 특혜-역차별 논란

2014년 11월30일 오전 10시쯤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클럽 O업소 앞에서 4~5명의 남녀와 내·외국인이 뒤엉켜 싸움이 붙었다. 박 아무개씨(여·44)는 마 아무개씨(31)에게 “왜 내 친구를 성추행했느냐”며 사과를 요구했다. 클럽에서 술을 마시던 박씨의 일행 중 ㄱ씨(여·36)가 마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박씨에게 알렸고, 이에 박씨가 따지고 든 것이다. 마씨가 성추행 사실을 부인하며 반발하자 그녀는 뺨을 한 대 때렸고, 이에 격분한 마씨는 박씨의 양손을 잡고 승강이를 벌였다. 이를 지켜보던 박씨의 남자친구인 외국인 학교 교사 J씨(미국 국적·38)가 마씨를 폭행했다. 검찰에 따르면, J씨는 마씨의 멱살을 잡아 유리벽에 밀치고, 주먹으로 얼굴을 다섯 차례 때렸다.

폭행을 당한 직후 마씨는 119구조대에 의해 순천향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곧바로 의식불명에 빠졌고, 사건 발생 열흘 만인 12월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J씨와 박씨는 폭행 사건이 일어난 11월30일 당일 자신의 집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은 외국인인 J씨에 대해 즉시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검찰은 “폭행 사실과 피해자의 의식불명 상태에 대한 인과관계가 불충분하다”며 이를 기각했고, 피의자 J씨는 풀려났다. 마씨 유족 측에서 “외국인에 대한 특혜냐”며 반발했고, 이 사건은 ‘제2의 이태원 살인 사건’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태원에 위치한 클럽 O업소 앞에서 외국인 J씨가 한국인 마씨를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시사저널 포토
유족 “사건 직후 열흘이나 피의자 J씨 풀어줘”

‘이태원 살인 사건’은 지난 1997년 4월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발생했다. 수사 당국의 처리 과정이 석연치 않아 전 국민이 분노한 사건이다. 당시 홍익대 학생이었던 조중필씨가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됐다. 당시 현장에 있던 두 미국인이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검찰은 ‘정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범인의 자백에만 의존해 수사를 진행했다. 결국 유력한 용의자는 본국으로 도주했고 눈앞에서 범인을 놓친 수사 당국은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2009년 영화로 상영되면서 재수사 여론이 들끓었다.

현재 피해자 마씨의 아버지는 “목격자가 확보됐고, 폭행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초동 수사 때 피의자가 불구속되었다”며 “J씨가 사고 이후 정상 생활을 영위한 열흘간 범행 장소에 나타나 보안요원과 말을 맞추고 술을 마시는 등 비상식적 행동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늑장 대응이 피의자에게 증거 인멸 기회를 줬다는 것이다.

경찰 측은 “인과관계가 충분하다고 보고 기소를 신청했지만, 검찰은 피해자의 의식불명이 내인성(內因性)으로 발생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씨가 사망한 후에 실시된 국과수 부검 결과, 마씨는 외인성(外因性) 뇌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때서야 검찰은 경찰이 재요청한 구속영장을 받아들였다. 수사 당국의 해명에도 외국인 특혜 의혹은 마씨의 아버지가 올린 인터넷 게시글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다. 1월30일 현재, 사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마씨 아버지의 글에 1만1000명 이상의 누리꾼이 서명했다. 한국 네티즌들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는 아니지 않으냐”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J씨 측 “한국 언론은 피해자 입장만 대변”

반면 J씨 일행은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외국인 특혜’가 아니라 오히려 ‘외국인 역차별’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서 발행되는 한 인터넷 영자 매체는 마씨가 자신을 성추행했다는 ㄱ씨의 발언을 실으며, “한국인 ‘나쁜 손’ 미국인 주먹에 맞아 사망(Korean ‘groper’ dies from American’s fist in Seoul)”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국내의 외국인 독자들은 “J씨는 ‘미국인 영웅(American Hero)’이고, 폭행은 성추행을 당한 친구의 ‘품위(dignity)’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는 글을 남겼다.

J씨의 외국인 친구 M씨는 J씨의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웹사이트에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000달러(약 100만원)를 모은 시점에, 웹사이트 관리자는 “가해 혐의를 받고 있는 이에게는 모금을 허락하지 않는다”며 계정을 강제로 닫았다. 그러자 M씨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모금 활동을 이어갔고, 현재까지 총 350만원가량이 모인 것으로 파악됐다.

모금 페이지에는 “한국 언론이 완전히 피해자 측만 대변한다(The Korean media sources are completely one-sided)”는 글이 올라와 있다. M씨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J씨의 변호사 비용과 피해자 마씨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모금 캠페인을 진행한다”고 페이지 개설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유족 측은 “살인자를 위한 모금 활동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가족들에게 사과 전화조차 한 번 안 한 이들이 무슨 병원비를 전달하겠나”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족은 “M씨를 비롯한 누구도 병원비를 전달하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마씨의 아버지는 관련 기사를 게재한 인터넷 영자 매체의 이 아무개 기자와 모금 사이트를 운영하는 M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유족 측은 “성추행이라는 없는 사실을 지어내 죽은 아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이 아무개 기자는 “사실만 썼을 뿐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밝혔다.

마씨가 실제 ㄱ씨를 성추행했는지 여부는 재판에서 양형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양측에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사실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클럽 O업소 건물 관리인은 “주말마다 100명 가까이 클럽에 들어가 정신이 없다”며 성추행 여부를 확인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폭행을 목격한 마씨의 일행 김씨도 “폭행 직전까지 친구(마씨)는 성추행 사실을 부인했다. 클럽 특성상 다른 사람이 성추행했는데 (ㄱ씨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인지 검찰 또한 박씨가 “ㄱ씨로부터 강제 추행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마씨와 실랑이를 벌인 것으로만 판단하고 있는 상태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엇갈리는 만큼, 사건의 진실도 오리무중이다. 이번 사건이 ‘제2의 이태원 살인 사건’과 오버랩되면서 국내에서는 ‘외국인 특혜’에 대한 비난 여론이, 국내 거주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거꾸로 ‘외국인 역차별’에 대한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18년 전에 발생한 이태원 살인 사건은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다. 이번 사건의 1차 공판은 오는 2월 중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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