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내가 진다, 너희는 하던 대로 하라”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2.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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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 믿음의 리더십…다음 목표는 월드컵 예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오랜만에 국민에게 기쁨을 줬다. 2015 AFC 아시안컵은 한국이 55년 만의 우승이라는 목표를 안고 나갔던 대회였다. 또 다른 목표가 있었다. 지난 브라질월드컵에서 잃어버린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5전 전승 무실점을 기록하며 결승에 진출한 한국은 홈팀 호주와의 격전 끝에 1-2로 패했다. 하지만 대회 내내 보여준 강인한 투지와 포기하지 않는 플레이는 박수를 받았다. 불과 7개월 전 월드컵 귀국길에 공항에서 엿 세례를 받았던 대표팀은 이번엔 꽃다발과 큰 박수를 받았다. 부임 후 6개월 만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직접 종이에 써 온 한국어를 서툴지만 진심을 다해 읽어갔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1월31일 호주에서 열린 2015 AFC 아시안컵 결승전 대한민국 대 호주 경기. 슈틸리케 감독이 눈물을 흘리는 손흥민을 끌어안고 있다. ⓒ 연합뉴스
의리에서 믿음으로 대표팀 달라졌다

브라질월드컵을 보며 국민들이 실망한 것은 부진한 결과 때문만이 아니었다. 태극마크에 대한 자긍심을 잃은 듯 무기력했던 경기력, 실패 후에도 자신의 책임이 아닌 듯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선수의 태도에 대한 지적이 컸다. 일명 ‘의리 축구’로 표현된 브라질월드컵 대표팀은 한국 축구를 향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번 아시안컵은 그때의 실망감을 확실히 치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토너먼트에 들어서며 시작된 팬의 믿음과 지지는 대표팀을 한층 신나게 했다.

의리가 아닌 믿음으로 운영된 대표팀은 난관을 극복했다. 대회 전부터 주요 공격수가 부상으로 빠지고 이름값이 떨어지는 공격진을 구성해야 했다. 대회에 들어가서는 이청용·구자철 두 핵심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대회에서 우리의 경기력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선수의 강인한 정신력이 부족한 부분을 메웠다”고 평가했다. 한국 축구의 가장 큰 무기인 투혼이 확실하게 발휘된 것이다. 부상을 참고 뛰며 정신력을 짜내는 것이 아닌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고비를 넘는 것이 21세기의 투혼이다. 그렇게 아시아의 호랑이는 저력을 되찾았다. 결승전에 나온 손흥민의 극적인 동점골이 대표적인 사례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와의 강한 신뢰로 하나의 팀을 만들어냈다. 그는 ‘덕장’이었다. 경기 시작 전 출입구 통로를 빠져나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그는 결속력을 높여줬다. 박주영 대신 발탁한 이정협에게는 면담에서 “책임은 내가 진다. 너는 하던 대로 하라”고 말하며 무한 신뢰를 줬다. 결국 이정협은 이번 대회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기자회견·인터뷰 등 공개적인 자리에서 선수에 대한 비판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다. 결승전 패배로 이어진 실점 장면에서 실수를 한 김진수에 대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뛰면 인간으로서 실수를 할 수 있다”며 감쌌다.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은 23명의 선수 중 22명이 기용됐다. 참가국 중 가장 많은 선수 기용이었다.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감기 몸살과 부상으로 7명의 선수가 대거 빠지며 위기를 맞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나머지 선수를 고루 기용하며 돌파했다. 대회 내내 슈틸리케 감독이 강조한 것은 “그라운드 위에 있는 11명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12명의 역할이 중요하다”였다.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에 나설 준비가 돼 있어야 진정한 강팀이 된다는 얘기였다.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은 기성용·손흥민 같은 핵심 선수와 베테랑 차두리·곽태휘, 그리고 처음 대표팀에 선발된 이정협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수가 자기 몫을 다해줬다.

기성용은 2013년 있었던 SNS 사태로 국가대표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 주장으로서 뛰어난 활약과 수평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팀 안팎에서 호평을 받았다. 기성용은 주장의 역할에 대해 “그라운드 위에서 의지가 되는 선수가 첫 번째고, 훈련이 끝나고 선수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두 번째”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기성용은 혼다 게이스케, 밀레 예디낙, 자바드 네쿠남 등 아시아의 내로라하는 선수를 밀어내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외신기자들도 입을 모아 “한국이 우승했다면 MVP는 기성용이었다”고 인정했다. 경기장 안에서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책임을 다했고 경기장 밖에서는 모든 선수에게 귀 기울였다. 식사 시간에는 매번 테이블을 바꿔가며 밥을 먹고 거기서 나온 의견을 정리해 슈틸리케 감독에게 직접 전달했다.

차두리와 곽태휘는 한동안 대표팀이 외면했던 베테랑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기성용은 두 베테랑이 실질적인 리더였다고 얘기했다. 차두리와 곽태휘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유쾌하고 낙천적인 모습의 차두리와 묵묵한 성격이지만 강한 리더십을 지닌 곽태휘는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두 선수가 그라운드에 서면서 대표팀은 한층 활기를 띠었다. 특히 이번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한 차두리를 위해 우승하겠다는 목표의식은 대표팀 전체에 중요한 동기부여가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치열한 내부 경쟁과 과감한 기용으로 새로운 기둥도 발견했다. 유일하게 전 경기를 풀타임 소화한 왼쪽 풀백 김진수는 제2의 이영표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한 체력과 수비력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왼발 킥으로 8강전과 4강전에서 잇따라 도움을 올렸다. 골키퍼 김진현은 단숨에 넘버원 골키퍼로 떠올랐다. 큰 키와 빠른 반응에서 나오는 선방 능력은 무실점 행진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이 발견한 진흙 속의 진주 이정협은 탁월한 문전 플레이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결승행에 기여했다.

슈틸리케 감독 ⓒ 연합뉴스
주장 기성용부터 상병 이정협까지 모두 MVP

슈틸리케 감독은 대회가 끝난 후 한국 축구를 향한 냉정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도 “시선을 아시아가 아닌 세계에 둬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돼선 곤란하다”고 얘기했다. 아시안컵으로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여기서 끝나선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가 강조한 것은 쉼 없는 전진이었다. “공을 가졌을 때 침착성을 잃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실수를 줄였다면 쉽게 우승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학원 축구에 의해 성장한 한국 축구는 축구를 제대로 하는 법을 가르치기 이전에 승리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게 슈틸리케 감독의 지적이었다.

2002년 한국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성공은 어제 내린 눈이다. 빠르게 녹아내린다”며 최대한 빨리 잊어야 새로운 성공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슈틸리케 감독 역시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성과에 대한 칭찬은 결승전 당일로 끝냈다. 그의 시선은 다가올 월드컵 예선과 동아시안컵에 맞춰져 있다. 제2의 이정협을 발굴하기 위한 준비와 기존 선수의 능력을 끌어내 높은 수준의 조직력을 갖추는 것이 슈틸리케 감독의 다음 미션이다. 아시안컵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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