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안은 ‘작은 공’에 강한가봐
  • 안성찬│골프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6.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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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스타 안재형-자오즈민 아들 안병훈 PGA 우승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영국 본토에서, 그것도 유럽프로골프협회(EPGA)가 들어선 곳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하리라고는. 더욱 놀라운 것은 세계 골프 랭킹 1위 로리 매길로이(25·북아일랜드)가 어이없이 탈락한 유럽 메이저 대회에서. 이 대회는 디 오픈과 함께 유럽 선수들에게는 반드시 우승해야 하는 꿈의 무대로 불린다.

5월25일 잉글랜드 서리 주 버지니아워터의 웬트워스클럽 웨스트코스(파72·7302야드)에서 열린 유럽프로골프투어 BMW PGA 챔피언십(총상금 50만 유로) 우승자는 놀랍게도 한국 선수 안병훈(23)이다. 그것도 4라운드 합계 21언더파 267타로 대회 최저타 기록이다.

쩍쩍 갈라지는 한국 남자 골프계의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내린 셈이다. 한국 남자 프로골프가 여자 프로골프와 달리 맥을 못 추고 있는 사이에 ‘깜짝 스타’가 나타난 것이다.

ⓒ AP연합
‘벼락 스타’ 아닌 준비된 선수

안병훈은 ‘자다가 일어나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됐다’는 ‘벼락 스타’가 아니다. 준비된 선수다. 그를 아는 사람은 잘 안다. 그가 탁구 스타로 국제결혼한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아들임을.

그는 묵묵히 고행의 길을 걸어왔다. 모두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정신이 팔리고,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최경주(45)와 양용은(43)이 활약하는 동안 안병훈은 외로운 싸움을 벌인 용병 같은 존재다.

그에 대한 평가부터 해보자. 성급한 판단일지 모르지만 한국 프로골프계를 이끌고 갈 대들보임에 틀림없다. ‘골프 지존’ 타이거 우즈(40·미국)와 ‘새끼 호랑이’ 로리 매킬로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물론 갈 길은 멀다. 유럽 투어에서 1승을 했다고 해서 1인자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미난 사실은 콧대 높은 유럽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언론은 안병훈이 우승하자 ‘일요일에 새로운 슈퍼스타가 탄생했다’고 앞 다퉈 보도했다.

프레지던츠컵 인터내셔널팀의 닉 프라이스(58·남아공) 단장은 “안병훈 선수가 오늘 거둔 우승은 정말 놀라웠다. 그는 굉장히 인상적인 젊은 선수다. 이처럼 큰 대회에서 압박감을 이겨내고 나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생애 첫 우승을 거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라이더컵 유럽 단장을 맡아 승리로 이끌었던 폴 맥긴리(48·아일랜드)는 “새로운 아시아 슈퍼스타의 탄생을 목격했다”고 했다. 이번 안병훈의 유럽 PGA 챔피언십 우승은 2009년 아시아 최초인 양용은의 PGA 투어 PGA 챔피언십 우승에 견줄 만하다.

안병훈이 골프 선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국 US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기 전까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 활동이 거의 없었다. 그는 세종초등학교 때 유소연(24·하나금융그룹)과 함께 방과 후 스포츠 활동을 한 선수다. 유소연이 1년 선배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 골프 감독을 지낸 조수현 서울시골프협회 부회장이 5년간 기본기를 가르쳤다. 6학년 때 성내초등학교로 전학했고, 이후 중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날아갔다. 때문에 한국에서 상비군이나 국가대표를 지내지 못했다.

조수현 부회장은 “병훈이는 골프 외에는 다른 운동과 맞지 않았다. 방과 후 수업을 통해 골프를 배웠는데 처음부터 거리를 내는 파워 골프를 했다”고 말했다. 조 부회장은 “그의 강점은 지기 싫어하는 남다른 ‘근성’에 있다. 창의 감성 교육의 1세대 성공작이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정상적인 공부와 골프를 병행했다. 그는 17세 때인 2009년, 최연소로 US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프로 전향을 결심했다. 2011년 프로에 진출했으나 처음부터 험난했다. 가시밭길이었다. 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차선책이 유럽행이었다. 유럽 투어도 만만치가 않았다.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2부 챌린지 투어를 뛰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아버지 안재형씨가 자동차를 렌트해 다녔다. 캐디 역할도 해줬다. 대회장에 갈 때마다 숙소를 잡는 것도 난제였다.

3년 동안 챌린지 투어에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갔다. 뛰어난 기량만 믿고 퍼팅 연습을 게을리 한 것도 화근이 됐다. 좀처럼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는 들어보지도 못한 작은 마을부터 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오만·케냐 같은 곳을 돌아다녔다. 아프리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공을 쌓았다. 드디어 올해 유럽 투어 정규 투어에 입성해 남아공·두바이·카타르·모로코·중국·스페인·영국 등 7개국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렀다.

2009년 9월 한국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안병훈 선수 가족. ⓒ 연합뉴스
2부 투어에서 체득한 ‘생존 능력’

그가 유럽에서 통한 비법은 뭘까. 장타력이다. 드라이브로 320야드를 쉽게 날린다. 여기에 아이언샷 감각도 뛰어나다. 이번 대회에서 주로 우드를 잡고 날린 드라이브 평균 거리가 294.6야드로 1위다. 페어웨이 안착률 63.85%(공동 35위), 아이언샷 정확도를 나타내는 그린 적중률 85%(1위), 평균 퍼트 수 28.75타(공동 12위)를 작성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2부 투어에서 체득한 ‘생존 능력’이 큰 몫을 했다. 최종일 누구나 겪는 심한 압박감에도 여유 있는 플레이를 했다. 특히 파5 12번홀에서 아이언으로 투온을 시켜 핀과 10cm에 붙일 정도로 흔들림 없는 샷 감각을 보였다.

올 시즌 그의 평균 타수는 69.69타(3위), 드라이브 평균 거리는 304.9야드(13위), 페어웨이 안착률은 59.37%(112위), 그린 적중률은 74.7%(12위), 그린 적중 시 홀당 퍼트 수는 1.745(40위), 유럽 투어 플레이오프 포인트 3위에 올라 있다.

설정덕 교수(중앙대 스포츠대학장)는 “그는 팔이 길다. 이는 아크를 크게 해 거리를 내기 좋은 구조다. 큰 키(186cm)에 어울리는 체중(95kg) 또한 파워를 내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며 “장타를 치려면 순발력이 필요한데 부모로부터 스피드를 요하는 탁구 선수의 장점을 이어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우승으로 안병훈은 오는 10월 송도 잭 니클라우스 코리아에서 열리는 프레지던츠컵 출전 선수에 한 발짝 다가섰다. 그는 랭킹 포인트 2.4046점으로 세계 골프 랭킹 132위에서 54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프레지던츠컵에서 미국과 샷 대결을 벌이는 인터내셔널팀은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호주 선수들로 구성된다. 세계 골프 랭킹 순으로 10명을 가리고, 나머지 2명은 단장 추천이 가능하다.

인터내셔널팀 랭킹에서 자동 출전권이 주어지는 10명 이내에 한국 선수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이 때문에 안병훈은 욕심이 생긴다. 오는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프레지던츠컵에 출전해 인터내셔널팀 우승을 견인하고 싶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도 한국 대표로 출전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달을 따고 싶다.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팬들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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