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의 정치…강도가 좀도둑 향해 “도둑이야” 외친다!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30 17:00
  • 호수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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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의 시시비비] 억지 쓰며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비겁함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17세 연하의 제자 알키비아데스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얘기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랑했던 제자 알키비아데스가 갑자기 정치에 뛰어들겠다고 말했을 때, 그를 한사코 만류했다. 소크라테스는 아직 영혼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정치를 하다 망가질 것을 우려하며, 델피 신전에 적혀 있던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를 한다. 하지만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그토록 흠모했던 스승의 말도 듣지 않은 알키비아데스는 결국 정치에 뛰어들고 참전했다가 소크라테스보다 일찍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만다. 

대체 정치란 무엇이기에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스승의 만류까지 뿌리치게 만들었던 것일까. 옛 시절 얘기지만,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치를 하기 위해 집 팔고 땅 팔다가 결국 패가망신했다는 일화도 제법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매력과 유혹은 그만큼 큰 것 같다.

그 유혹의 소산이 내로남불의 정치다. 내가 그러면 로맨스, 남이 그러면 불륜이라 강변하는 내로남불의 정치는, 정치적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억지를 쓰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적 생존법이다. 또한 진실을 덮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라도 정치적 승리를 거머쥐려는 비겁한 행태다. 문제는 이러한 내로남불이 여야 불문하고 버젓이 판치고 있으며, 여야 정치인들 서로가 서로를 내로남불이라 비난하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예를 보자. 50대의 가장이 퇴직 이후의 생활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과거에 자신이 비난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이고, 그러고서도 내 경우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나섰던 당당함이었다. 똑같은 재개발 상가 매입도 다른 사람들이 하면 ‘악한 투기’가 되고, 진보적 정권에 속한 내가 하면 ‘선한 투자’가 되는 것인가. 공정하지 못한 이중 잣대는 그 사회에서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합의와 승복을 어렵게 만들고, 정의를 역사의 것이 아닌 특정 진영의 전유물로 전락시키고 만다.

어디 김 전 대변인에게 국한된 얘기일까. 적폐청산을 내걸어왔던 문재인 정부의 고위 공직자나 여당 정치인들의 신상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내로남불 프레임은 야당의 반격 무기가 되어 왔고, “진보도 알고 보니 마찬가지”라는 여론의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왼쪽)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오른쪽)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 연합뉴스
(왼쪽)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오른쪽)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 연합뉴스

다주택자가 다주택자 향해 투기라고 비난

그렇다고 적폐의 업보를 안고 있는 현재의 야당이 자유로울 리는 없다. 제1야당을 이끌고 있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부터가 내로남불의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그는 지난 당 대표 경선에 나서 “문재인 정권은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정권이면서도 착한 척,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하는 내로남불 끝판왕”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황 대표는 그 얘기를 박근혜 정부를 향해 먼저 했어야 했다. 불과 수년 전 그가 박근혜 정부의 제2인자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자신이 국무총리를 맡아 국기를 무너뜨린 정권의 두 번째 책임자가 자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바뀐 정권 공격의 선봉에 서는 광경을 보니 내로남불도 이런 내로남불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망가뜨린 것은 로맨스, 남이 잘못하는 것은 불륜, 가치의 전도 현상이다.

방송 장악을 둘러싼 여야 공방만 해도 그렇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방송에 대한 정권의 통제와 간섭이 계속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에 반기를 든 많은 방송인들이 해직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방송 경영진들이 들어서자 정반대의 방송 장악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날 자신들이 했던 행동은 눈감은 채, 새 정권이 방송 장악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던 제1야당의 모습도 목불인견이었다. 물론 지금의 정권도 지난 정권의 잘못을 답습하는 일은 없는지 경계해야겠지만, 강도가 좀도둑을 향해 “도둑이야!”를 외치는 장면은 낯 뜨겁기만 하다. 의도적인 망각을 즐기는 모습이다.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면, 다주택자들을 그렇게 비난하던 여당 사람들도 알고 보니 다주택자들이었고, 그런 여당 사람들을 비난하는 야당 정치인들 또한 알고 보니 다주택자들이었다. 다주택자는 무조건 죄인시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별개로 하고, 왜 자기의 다주택은 생활을 위한 로맨스이고 타인의 다주택은 투기를 위한 불륜으로 다스려져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자기편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방패가 되어 주려는 정파적 충성을 하다 보니, 정치적 소신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모습도 많다. 어느 정권 아래서든, 인사청문회만큼 내로남불의 정치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여당은 지난 정권 아래서는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던 사안들에 대해 감싸주기에 급급하고, 야당들은 지난 정권 시절 바로 자신들이 행했던 일들을 단죄하는 정의로운 심판자로 급변신했다. 특히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온갖 반민주적 횡포에 대해 호위무사 역할을 하던 정치인들이, 이제 정권이 바뀌니까 민주투사라도 된 듯이 행세하는 모습은 낯 뜨거운 일이다. 한 입 갖고 두 소리 하지 말라 했거늘, 한 입에서 시류에 따라 세 소리, 네 소리가 나온다. 여야가, 그리고 보수와 진보가 서로 욕하면서 닮아버렸다는 지적이 지나친 매도는 아니다.

그런데 내로남불에 익숙한 정치인일수록 자신의 변신에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말 바꾸기나 이중 잣대에 대한 겸연쩍음이나 미안함을 드러내는 정치인을 찾기가 드물 지경이다. 이는 겸손과는 등진 정치의 속성 때문인지 모른다. 

겸손은 인간의 미덕이다. 일찍이 노자는 “무서운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처럼 살라”고 했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치켜세우는 법이다. 미성숙한 인간일수록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허영에 갇혀 산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세계는 정반대다. 나만이 최고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들은 자격미달의 인물로 깎아내려야 내가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선거는 그 집약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이란 숙명적으로 낯 뜨거운 존재들인지 모른다. 자신의 잘못을 성찰할 줄 모르는 내로남불의 정치는 겸손을 모르는 오만의 정치와 맞닿아 있다.


정치의 출발은 윤리여야

하지만 정치 현실이 아무리 우울해도, 우리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넓은 의미의 ‘정치학’이란 인간의 좋음을 목표로 하는 모든 실천적 행위를 망라하는 ‘윤리학’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즉 윤리학과 정치학 양자를 포괄하는 ‘정치학’을 ‘넓은 의미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의미하듯이, 정치의 출발은 윤리여야 하고 그때 비로소 인간들의 좋은 삶을 위한 정치가 가능하다.

정치가 윤리와 도덕으로만 가능할 수 없겠지만, 그것을 포기한 정치가 공공의 선에 기여할 수는 없다. 내로남불의 정치는 진실이 거세된, 국민을 상대로 식언을 일삼는 거짓의 정치다. 그러니 국민을 바보로 여기고 내로남불의 정치를 태연하게 반복하는 정치인들을 걸러내는 데 우리가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불륜을 로맨스로 위장하려는 정치인들을 찾아내고 고발하자. 불륜이 불륜인 것은 진보냐 보수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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