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00년] 쏘냐·애순·옥희에서 자윤·연홍·미쓰백까지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2 14: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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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 스크린 속 여성은 어떻게 변했나

1919년 10월27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의리적 구토》가 최초 상설 영화관 단성사에서 상영된, 한국영화사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여성 배우는 무대에 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극 중 계모 역할은 여장남자가 맡았다. 한국영화에 여성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23년, 《월화의 맹서》에 출연한 이월화가 최초다. 한국영화사 100주년을 맞이한 지금, ‘활동사진’이라 불리던 연쇄극은 ‘영화’라 불리고,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이 허락조차 되지 않았던 여성 배우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다.

여성이 스크린에 당당하게 설 수 있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카메라는 근본적으로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을 응시한다. 남성을 시선의 주체로, 여성을 시선의 타자로 위치시키는 이분법은 여성을 남성의 시선, 즉 성적 욕망, 감시,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가 1975년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에서 언급한 이 말은 과거 스크린 속 여성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과거 한국영화를 보더라도 그렇다. 남성 중심이었던 영화 산업 시스템 속에서 여성 캐릭터는 제한적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지영, 정유미|《미몽》의 애순, 문예봉
《82년생 김지영》의 지영, 정유미|《미몽》의 애순, 문예봉

 

팜므파탈·조신한 여성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여성은 남성이 만든 이상적인 모습, 혹은 욕망을 발현시키는 캐릭터, 체제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여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영화사에서 매혹적인 팜므파탈로 기억되는 《지옥화》(1958)의 쏘냐가 있었고, 《미몽: 죽음의 자장가》(1936)에서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매력적인 캐릭터 애순이 있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는 질서에 순응하면서 품위를 유지하는 여성을 비췄고, 《씨받이》(1986)는 가부장제 사회상의 비극을 마주하는 옥희를 그렸다.

영화가 조금씩 변화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여성 프로듀서와 감독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면서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크린 속 여성들도 진화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해피엔드》(1999), 《바람난 가족》(2003)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다. 사회적으로, 성적으로 당당한 여성들이 작품 내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여성의 인권, 여성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들에 대한 니즈가 생겨났다. 다양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스크린에 등장했다.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1960년의 《하녀》와 달리, 주인을 해방시켜 함께 도망친 《아가씨》(2016)의 하녀 숙희가 있었고, 자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선과 악을 넘나드는 《마녀》(2018)의 자윤이 등장하는가 하면, 《82년생 김지영》(2019)처럼 평범하지만 한 인격체로서 우뚝 선, 주체적인 한 여성의 서사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여성 배우가 단독 주연인 영화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시사저널은 한국영상자료원의 특별 전시 ‘나쁜 여자, 이상한 여자, 죽이는 여자’와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발간 자료, 한국영화사 관련 서적 등을 바탕으로 지난 한국영화사에서 여성이 거쳐온 캐릭터를 짚어봤다.

《차이나타운》의 엄마, 김혜수|《아름다운 악녀》의 은미, 최지희
《차이나타운》의 엄마, 김혜수|《아름다운 악녀》의 은미, 최지희

 

경계를 넘는 여성의 등장

과거 한국영화에서 ‘나쁜 여자’는 남성의 지배를 거부한 여성이었다. 《아름다운 악녀》(1958)의 은미가 보여준 모습이다. 남성의 소유와 감시를 벗어난 여성은 ‘나쁜 여자’다. 그러나 결국 주인공은 또 다른 남성에게 안주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남성에게 종속적이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무법지대에서 활약하는 나쁜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홍콩에서 온 마담장》(1970)의 미령, 《20인의 여도적》(1971)의 여도적들을 통해 영화계는 전통적인 성 역할에 질문을 던졌다.

2000년대부터는 스스로 ‘악녀’가 되기를 강행한 여자들이 스크린에 등장했다. 《조폭마누라》(2001)가 시작이었다.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의 복남은 폭력을 통한 개인적인 복수에 자기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죄책감과 자기 갈등을 드러냈다. 이들이 ‘나쁜 여자’가 되는 이유에는 모두 서사적 동기가 있었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남성을 죽이거나, 성폭력 피해자 여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하고 칼을 휘두른다. 가부장 사회와 법이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은, 이들이 나쁜 여자가 되는 원인이 된다. 자신에게 불완전한 법을 보완하기 위해 직접 살인과 폭력을 저지른다.

이와 다르게 돈과 권력,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녀가 되는 역할이 2010년대 이후에 등장했다. 《박쥐》(2009)의 김옥빈은 생존을 위해 섹슈얼리티를 사용하고,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캐릭터로 그려졌다. 《차이나타운》(2014), 《미옥》(2017), 《악녀》(2017)의 여성 캐릭터들은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나쁜 여자가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기존의 나쁜 여자들에게는 가족의 원수를 갚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서사적 이유가 있었다면, 이후 등장한 여성 캐릭터들은 욕망에 충실했다.

《마더》의 엄마, 김혜자|《어미》의 홍 여사, 윤여정
《마더》의 엄마, 김혜자|《어미》의 홍 여사, 윤여정

 

모성애에 그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울림

과거 한국 사회에서 ‘모성’은 필수 덕목이었다. 《이 생명 다하도록》(1960)에서는 전쟁으로 하반신 장애를 입은 남편을 극진하게 돌보는 아내이자 한 가정의 희생을 도맡는 어머니가 비춰진다. 분단과 전쟁, 휴전 이후의 재건 과정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헌신’과 ‘인내’가 모성 신화를 통해 강조된 것이다. 자식들을 소홀히 하는 어머니들은 응징을 당했다. 《자유부인》(1956)과 《화조》(1978)의 결말에서 볼 수 있듯, 춤바람이 난 어머니, 남자와 우정을 가진 어머니는 사회적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서사 속에 갇혀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모성성은 가정 내에서 보여주는 인고와 헌신이라는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사회적 능력과 복수를 수반하게 됐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 안에서 스스로 범법자가 된다. 그 전에 나온 어머니들은 경제적 능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모성을 증명하는 캐릭터였다면, 1985년 작품 《어미》는 달랐다. 납치된 딸의 복수를 위해 본능을 발휘하는 어머니 홍 여사는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텔리 여성’으로 그려졌다.

이 영화를 통해 어머니라는 역할은 지금까지의 어머니와는 다른 강렬한 상을 남겼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다양한 캐릭터로 진화했다. 《오로라공주》(2005), 《친절한 금자씨》(2005)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유괴한 자들에게 ‘핏빛 복수’를 했고, 《마더》(2009)의 어머니는 아들의 무죄 석방을 위해 증인을 살해한다. 딸의 복수를 위해 남편을 처벌하는 《비밀은 없다》(2015)의 연홍, 자기 딸에 대한 애착 때문에 다른 집 아이를 훔치는 《미씽: 사라진 여자》(2016)의 지선까지, 이전까지 한국영화가 그려냈던 ‘어머니’와는 다른 모습인 것은 분명했다.

또 모성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마더》가 그려낸 어머니의 사랑은, 증인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남의 자식을 살인범으로 만들고 마는 이기적인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자리 잡기 전,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복기하고 자아를 찾는 과정을 거친다.

오히려 어머니로 대표되던 가족성이라는 개념은 확장됐다. 보살핌과 배려를 보여주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위험에 처한 아이를 외면하지 못하는 여성을 그린 영화 《미쓰백》(2018)은 ‘엄마’로 호명되기를 거부하며 어머니 노릇을 하고자 하는 인물을 통해 어머니라는 캐릭터에 한정됐던 보살핌과 나눔의 경계를 확장했다.

(왼쪽부터)박남옥 감독, 임순례 감독, 윤가은 감독, 김보라 감독 ⓒ 연합뉴스·뉴스뱅크이미지·엣나인필름 제공
(왼쪽부터)박남옥 감독, 임순례 감독, 윤가은 감독, 김보라 감독 ⓒ 연합뉴스·뉴스뱅크이미지·엣나인필름 제공

 

그럼에도 아직 부족한 여성 중심의 서사

이렇게 여성의 주체적 지위가 생겨나고 진일보한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한국영화계에서 여성 중심의 서사가 확립됐다고 공언하기에는 부족하다. 10월5일 영화진흥위원회의 ‘데이터로 본 한국영화 성평등 현황’ 발표 결과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개봉한 영화 중 여성 감독 작품 비중은 평균 9.7%였고,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10년 평균 33.6% 수준에 그쳤다. 특히 2009~18년까지 흥행한 50위 영화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6.2%, 여성 주연 영화는 24.4%에 불과했다.

카이스트 연구팀의 분석 결과도 주목된다. 연구팀이 컴퓨터 비전 기술을 통해 2017~18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와 우리나라 영화 40편을 분석한 결과, 여성은 남성에 비해 슬픔과 공포, 놀람 등 수동적인 감정을 더 많이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주변 사물 중 가구와 함께 등장하는 비율이 남성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 캐릭터가 자동차와 함께 나오는 비율은 남성 캐릭터 대비 55.7%밖에 되지 않았던 반면, 가구와 함께 나오는 비율은 123.9%를 보였다.

여성 캐릭터의 시간적 점유도도 남성 캐릭터 대비 56% 정도로 낮았다. 여성의 평균 연령은 79.1% 정도가 남성보다 어리게 나왔다. 카이스트 연구팀은 이 같은 지표 결과가 외국 영화보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더 두드러지게 관찰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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