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회고’의 무게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6.29 09:00
  • 호수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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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지금도 이름만 대면 다 알 만한 유명 인사로부터 자서전을 대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직접 만나 구술을 들은 후 책을 집필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직장에 매인 몸이기도 했거니와 그 인물의 명성에 따르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아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그처럼 우리 주변에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일생을 기록해 남기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 내놓은 기록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목을 끌지 못한 채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하지만 일부 극소수의 책은 세간에 회자되며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절 중앙정보부장으로 위세를 떨쳤던 김형욱의 회고록이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그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으로 박 전 대통령을 비방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 일화는 올 초에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영화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회고록을 통해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전두환 전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책 내용으로 인해 고소당한 사건의 재판이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금 미국에서도 막 나온 회고록 한 권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출간되기도 전에 시차를 두고 찔끔찔끔 공개된 내용이 그야말로 죄다 폭탄급이었다. 특히 기밀에 가까운 외교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파장이 엄청났다. 폭로 당사자는 모든 기록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만 읽는 사람은 그 내용들을 정황으로만 미루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제3자가 쓴 전기(傳記)도 아니고, 객관적 검증도 거치지 않은 만큼 그냥 개인의 독백이라고 해야 마땅한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독백이 지금 세계를 거세게 흔들고 있다. 글을 쓴 사람이 숙제를 내고, 세상이 그 숙제를 풀어야 하는 구조다.

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18일(현지 시각) 촬영된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일이 일어난 방'의 표지 ⓒ 연합뉴스
미국 백악관을 배경으로 18일(현지 시각) 촬영된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일이 일어난 방'의 표지 ⓒ 연합뉴스

이처럼 까다로운 숙제를 제시한 이는 지난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의해 경질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회고록의 제목은 《그것이 일어났던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이다. 이 책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2018년 6월12일 북·미 정상의 싱가포르 회담, 2019년 6월30일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등과 관련한 비화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들에 근거해 국내에서는 현 정부 한반도 정책의 방향성을 둘러싼 논란도 거세게 이는 상황이다.

미국 내에서 ‘슈퍼 매파’로 불리는 볼턴의 이번 회고록은 스스로 부당하다고 여긴 것들을 바로잡겠다는 의욕의 산물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단순한 한풀이용일 수 있다. 책 제목인 ‘그것이 일어난 방’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들이 직접 진위를 확인해 주고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어떤 내용도 ‘설(設)’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그의 회고록은 이미 미국 안팎에서 내용의 사실성을 의심받거나 수정을 요구받기까지 했다.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는 데는 인색한 채 자기 자랑이나 자기 신념만 늘어놓는 회고록은 기록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 회고록은 그냥 회고록일 뿐이다. 한 나라의 역량이 총망라되어 이뤄지는 외교 행위에 대한 평가가 일부 검증되지 않은 언설에 쉽게 흔들리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가뜩이나 딜레마에 빠져 있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누군가의 회고에 의존해 판단하고 ‘복기’하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을 통해 다시 세워가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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