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그래도, 그들이 있어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23 09:00
  • 호수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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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까지 그다웠다. 여태껏 예측하기 힘든 행동으로 이목을 끌어왔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이 예측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 점만 달랐을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얘기다. 그는 대선에서 패했음에도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지금까지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선거 이후에도 특유의 ‘트위터 정치’를 계속하며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버틴다.

그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음으로써, 내년 1월20일 대통령 취임일까지 미국의 남은 시간은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혼탁함에 갇혔다. “미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거친 72일이 될 것”이라는 CNN 방송의 전망이 과장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 72일은 다른 말로 표현해 미국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올라선 시간이기도 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미국 정치의 향방이 결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불복과 함께 미국은 극심한 분열 상태로 접어들었다. 당장 지난 주말에는 수많은 군중이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DC에 집결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트럼프 지지자와 반대자가 뒤엉켜 격하게 대립하면서 물리적 충돌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혼돈에 휩싸인 미국 민주주의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9월21일 오하이오주 선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
ⓒAP 연합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대세에 밀려 대선 패배를 인정하고 승복할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흔들린 미국 정치가 곧바로 중심을 바로잡고 일어설지는 알 수 없다. 트럼프가 물러선다 하더라도 그를 추종하는 지지자들의 외침이 쉽게 사그라들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 정치에 남긴 ‘트럼피즘(미국 우선주의 등 트럼프의 정책과 언행에 열광하는 현상)’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과학기술 등 많은 분야에서 선진적인 면모를 보여온 미국이 이처럼 혼란에 빠져든 모습은 낯설고도 걱정스럽다. 특히 여러모로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미국 민주주의 자체가 세계인의 걱정거리로 떠오른 점이 크게 안타깝다.

하지만 미국 민주주의가 마냥 비관적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든든하고 강력한 버팀목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론의 힘이다. 오랜 기간 신뢰를 바탕으로 권위를 쌓아온 미디어들이 휘청이는 민주주의의 중심을 확고하게 떠받치고 있다. 이번 대선 기간에도 미국 주류 매체들은 사실 보도를 통해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일부 방송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 도중 ‘선거 부정’ 등을 연거푸 주장하자 생방송을 중도에 가차 없이 끊어버리기도 했다. 그가 근거 없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한 뒤 지난 2017년 새해 첫날 기습적으로 연 기자간담회의 풍경을 기억하는 우리로서는 더없이 부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보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생방송마저 중단하면서 ‘제 할 일을 하는’ 언론이 있는 한, 근거 제시 없이 일방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트럼프를 향해 “추하고, 한심하다”라고 거침없이 비판하는 방송인이 있는 한 미국은 어쩌면 ‘America is back’이라고 한 바이든 당선인의 말처럼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신뢰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언론과 그 언론을 믿어주는 대중의 존재가 그런 전망을 가능케 해 준다. 
정치가 흔들린다고 해서 언론까지 흔들리면 더는 기댈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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