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은 도전·창조적 리더, 이병철은 완벽주의자”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21.04.14 10:00
  • 호수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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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CEO가 전설의 CEO를 말하다 
인터뷰 -한국 산업사의 산증인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은 우리나라 산업 근대화의 산증인이다. 그 시대 재계 거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30대 초반 외국계 기업(제너럴일렉트릭·GE) CEO(최고경영자)에 오른 그에겐 ‘기업 이익’보다 앞선 게 있었다. 바로 한국 경제 부흥이다. 삼성, 현대가 일찍부터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는 강 전 회장과 그가 몸담았던 GE의 공이 컸다. 삼성그룹과 손잡고 항공기 엔진 제조 사업과 첨단의료기기 제조 합작회사를 세운 것이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과 발전설비 제조 사업 및 장기공급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 좋은 예다. 당시 GE 내부에선 최첨단인 이들 사업에서 해외 기업과 손잡는 것에 반발했지만 강 전 회장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30대 때부터 그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등 전설의 재계 거목들과 함께했다. 3월31일 서울 태평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강 전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인재 중심 경영’, 정주영 회장의 ‘창조적 도전정신’이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강 전 회장은 “매년 10월 잭 웰치가 한국을 찾아와 이병철, 정주영 회장과 만나던 때가 생각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정주영 회장이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전혀 열등감을 갖고 있지 않고 모험을 즐기며 동시에 굉장히 창의적인 CEO였다면, 이병철 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챙기는 완벽주의자였다”고 기억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GE 전설’ 잭 웰치가 가장 사랑한 한국인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때 세계 경영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GE의 수장 잭 웰치가 가장 사랑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강 전 회장은 잭 웰치가 GE 회장에 취임할 무렵 GE코리아 사장에 임명됐고, 잭 웰치가 퇴임한 이듬해에 GE코리아 회장에서 명예롭게 물러났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영혼이 통하는 친구)나 다름없다.

강 전 회장이 처음 주창한 세계화(Globalization) 경영전략은 GE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전까지 GE가 추진한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 전략이 해외 수출에만 국한돼 있던 것과 달리, 강 회장의 전략은 GE가 진출 국가의 경제 발전을 함께 도와 장기간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양측의 ‘윈-윈’(Win-Win)을 이끌어내는 게 핵심이다. GE와 잭 웰치가 이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친 것은 ‘한국’이라는 성공 모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잭 웰치가 강 회장이 기획·추진한 한국형 모델을 채택하면서 ‘컴퍼니 투 컨트리 어프로치(Company to Country Approach·한 국가를 동반자로 보고 장기적인 접근 방식을 택한다는 의미)’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최장수 외국계 기업 CEO 자리에서 물러난 뒤 강 전 회장은 한국형 기업의 성공모델을 연구해 왔다. 그 결실이 2015년 네덜란드의 기술공학 명문 트벤테대(Univ. of Twente)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리더십 조직문화, 지식생산성과 가치창조)이다. 강 전 회장은 “삼성과 같은 한국 대기업들은 그룹 회장의 도전적인 장기 비전에 전문경영인의 역량과 리더십이 결합된 투 톱스(Two-Tops)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도 최근 우리 기업들의 성장 엔진 소리가 작아지고 있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그는 “종업원(從業員)이라는 말은 사무라이 정신에 기반을 둔 일본식 잔재”라면서 “회사 구성원을 동반자·협력자로 바라봐야 하며, 잭 웰치가 GE에서 그랬던 것처럼 세계 1, 2위로 도약 가능한 사업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강 전 회장에 따르면, 지금까지와 같은 제조업 시대에는 그나마 미래 예측이 가능하기에 문어발식 확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래 경영환경은 예측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정답은 업종 다변화가 아닌 ‘선택과 집중’에 달려 있다는 게 강 전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각 기업마다 우리가 세계 1, 2위가 될 수 있는 산업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들 핵심 산업을 완벽하게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웃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선택과 집중의 시간은 불과 2~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는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왼쪽)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1985년 서울 태평로 삼성그룹 사무실에서 만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오른쪽). 강 전 회장 오른편에 있는 이가 잭 웰치 GE 회장이다.

“세계 1, 2위 도약 가능한 업종에 올인해야”

반기업 정서가 여전히 팽배한 것도 국내 대기업들 앞에 놓인 숙제다. 그는 한국 대기업들이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를 ‘윤리의식 부재’에서 찾는다. 강 전 회장에 따르면, GE를 비롯해 서구 선진기업들은 엄격한 윤리기준이 기업 문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는 “대기업만 윤리경영을 실천할 게 아니다. 중견·중소기업, 심지어 자영업자도 윤리경영이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대기업들이 ESG(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함) 경영을 도입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대목이다. 강 전 회장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회사의 순이익 중 일부는 ESG에 써야 하며 기업 구성원들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급여를 사회시민 기금으로 내 조직의 ESG 활동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기업 가치 창조는 기업 이익, 주가 상승에, 모든 조직 구성원의 기업 만족도와 이를 토대로 고객들의 만족도가 더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를 향해서는 “환경과 사회 윤리에 저촉되는, 다시 말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분야만 제한하고 나머지는 규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 전 회장의 말이다. “요즘 보고 있노라면 국회나 국회의원들은 규제를 만드는 게 직업인 것 같아요. 관료들은 규제가 없어지면 마치 자기 일자리가 없어질 것처럼 생각하고요. 이렇게 해선 안 됩니다. 필요하면 대전 대덕 연구단지 내 국립연구기관에서 연구된 기술도 중소·중견기업에 넘겨야 합니다. 첨단 부품·소재 기업에만 상속세를 감면해 줘 기업의 고유하고 독특한 기술이 후대에 잘 승계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한 분야에 몰입해 커다란 성과를 낸다고 해서 잭 웰치로부터 “칭기즈칸 스피릿, 크레이지 캉(Chingiz Khan Spirit, Crazy Kang·칭기즈칸의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경영자 강석진)”이란 찬사를 들었던 1939년생 강 전 회장은 한때 동반자였던 이병철, 정주영, 그리고 파란 눈의 천재 경영인 잭 웰치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홀로 남아 미래 산업의 변신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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