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좋아, 빠르게 가”의 함정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05 08:05
  • 호수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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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국민’. 윤석열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 가장 많이 내놓은 단어가 이것이다. ‘자유’는 이미 취임사에서 35회, 77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33회 언급돼 대통령의 ‘최애’ 단어로 꼽힐 만하다. ‘국민’을 말하는 횟수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지난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 연설에서는 이 ‘국민’이라는 말이 스무 번 넘게 사용됐다.

대통령은 ‘국민’을 이처럼 애타게 말하고, 부르지만 정작 당사자인 국민들의 마음은 완강하게 냉담하다. 구애에 호응하기는커녕 차가운 반응만 계속 보이고 있다. 60%대에 고착되다시피 한 대통령 국정수행 부정평가가 그것을 또렷이 반증한다. 윤 대통령의 일 품새가 국민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다. 국민을 간절하게 찾는 대통령, 그것을 외면하는 국민. 이 단절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큰 원인은 성급함에서 찾을 수 있다.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의 뜻과 어긋난 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 중 ‘독선적인 일처리’가 가장 높은 비율로 지적된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행정안전부 내 경찰국 신설, 초등학교 입학 연령 하향 조정 등 전문가나 국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역풍을 맞은 사례는 벌써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국민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대신 국민들이 원치 않는 일을 어설프고 섣부르게 서두르다 국민들의 눈 밖에 났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기간에 선거운동의 한 방식으로 짧은 영상을 즐겨 사용했다.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나 원희룡 현 국토부 장관 등이 “후보님, 추진할까요?”라고 물으면 윤석열 당시 대선후보가 “좋아, 빠르게 가”라고 화답하는 형태의 59초짜리 공약 콘텐츠도 선보였다. 이 영상들은 당시에 상당한 화제를 모으며 유권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선거라는 특수 상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거유세는 일정 기간이 지나야 득표로서 점수가 매겨지지만, 국정은 다르다. 채점이 즉각 이뤄지고 그것이 여론으로서 표출된다. 대통령이 앞으로도 그 “좋아 빠르게 가”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큰 낭패를 부를 수 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상태에서 ‘빠르게’만 앞세워 가다가는 대통령이 여러 차례 다짐한 ‘분골쇄신’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기 쉽고, 더 지나치면 국정운영에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 않아도 될 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열심히 해서는 될 일이 없다는 얘기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중에서 가장 마음을 끈 것은 “국민의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 ‘숨소리’라는 어휘가 자신의 결기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국민의 숨소리를 들으려면 몸을 한껏 낮춰야 한다. 국민보다 높이 서 있으면 어떤 숨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한국가톨릭교회의 네 번째 추기경에 서임된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이 서임 감사 미사에서 남긴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제 곧 민족의 큰 명절 한가위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다. 그 자리에서 오고 갈 말들이 진정한 민심이고, 국민 숨소리다. 한 외국 주간지가 지적하기도 했던 대통령의 ‘기본’, 정치의 ‘기본’은 민생의 현실이 요동치는 바로 그 공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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