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물 한 컵’이 온전하게 채워지려면…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3 08:05
  • 호수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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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야구 경기 관람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6년 만에 다시 열린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는 가뭄 속 단비처럼 반가웠다. 한국팀에 대한 기대감도 사뭇 컸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한국은 1라운드조차 넘지 못했고 일본은 결승전에서 미국을 꺾어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팀은 귀국해서 열띤 환영을 받은 반면, 예선에서 탈락한 한국팀은 가시방석으로 내몰렸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대회가 끝난 후 “한국 선수에 ‘비행기로 가지 마. 배 타고 귀국해!’ ‘일본과 수준이 너무 달라’ ‘이건 동네 야구?’… WBC 참패의 한국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현실’…세계와의 엄청난 격차” 같은 일본 네티즌들의 조롱 섞인 비난이 기사화돼 나온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인 다수가 아닌 일부의 반응일 테지만, 오는 말이 곱지 않으면 듣는 귀 또한 고와지기 어렵다.

이렇듯 작은 말 한마디로도 감정이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서로 이웃한 한국과 일본의 관계다. 그런 답답함을 타개하겠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데 그 후폭풍이 심상치 않다. 일본의 과거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그가 해법으로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은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후에도 만만찮은 여진을 남기고 있다. 물론 교착된 양국 관계를 개선해보겠다는 의지와 노력은 나름으로 점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행위들이 이렇다 할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의지와 노력만으로 외교가 완성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지정학적 위치 탓에 고대부터 오랜 기간 외세와 마찰을 빚어야 했던 우리의 외교사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은 어쩌면 ‘친선’이나 ‘교린’일 것이다. 그 둘을 합쳐 ‘선린’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선린’은 당사국들의 선의가 충분히 담보되었을 때만 제대로 된 효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느 한쪽이라도 불순한 의도를 앞세울 경우 우호적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선린을 뒷받침할 ‘호혜(互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런 탓인지 여론조사에서도 윤 대통령의 제3자 변제안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룬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3월28일 교과서 검정심의회를 열어 2024년도부터 초등학교에서 쓰일 교과서 149종이 심사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그중 일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병에 관한 기술이 강제성을 희석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사진은 현행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돼 있는 자료사진 설명을 '지원해서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바꾼 도쿄서적 6학년 사회 교과서. 위쪽이 현행 교과서 ⓒ 연합뉴스
일본 문부과학성이 3월28일 교과서 검정심의회를 열어 2024년도부터 초등학교에서 쓰일 교과서 149종이 심사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그중 일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병에 관한 기술이 강제성을 희석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사진은 현행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돼 있는 자료사진 설명을 '지원해서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바꾼 도쿄서적 6학년 사회 교과서. 위쪽이 현행 교과서 ⓒ연합뉴스

일본은 또 어떤가.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후에도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해 과격한 언행을 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일부 매체에는 “다케시마(독도)의 불법 점거, 이토 히로부미 암살, 위안부 문제, 징용공 문제 등등 다수의 문제에 대해 사죄해야 할 쪽은 한국이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까지 버젓이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일본의 유력 언론사가 최근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일본 국민의 56%가 정상회담 이후에도 한일 관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반응했고, 68%는 제3자 변제안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정황들이 말해주듯,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상황에서도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리 정부가 언급한 ‘일본이 채울 물컵의 반’도 계속해서 논란거리로 남을 공산이 크다. 그에 더해 회담을 주도한 양국 정상에 대한 자국 내 지지율 추이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회담 이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하락하고 기시다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크게 상승한 작금의 현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이제는 곰곰이 새겨봐야 할 차례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을 권리로 여기게 된다’라는 말과 ‘호혜’라는 단어에 함축된 뜻이 무엇인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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