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조차도 거부하는 아르헨티나 화폐, 경제회생 희망은 있나?
  • 정덕주 남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8 11:05
  • 호수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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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8%의 살인적인 인플레에 기준금리 97%까지 높여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도 해결책 안 보여 ‘암울’

안데스산맥을 두고 서쪽으로 칠레와 인접한 아르헨티나 도시들은 주말마다 아르헨티나 화폐인 ‘페소’의 평가절하와 환율 차를 노리는 칠레인들의 원정 쇼핑으로 장사진을 이룬다. 칠레보다 약 70%나 저렴한 생필품들을 사기 위해 이들은 육로를 이용해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를 찾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국경지대에 위치한 한 도시의 마트에 침입한 강도가 점원을 위협해 돈을 강취해 가는 과정에서 페소는 쓸모없다며 거절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강도도 외면한 돈이라며, 현지 화폐의 가치가 얼마나 바닥을 쳤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험난한 경제위기의 바다에서 난파선을 타고 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기 위해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 비상지원금’ ‘빈곤층 지원금’ ‘비상 가족 지원금’ 등 각종 복지 혜택을 남발했으며, 팬데믹 이후에는 둔화된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공공요금 동결, 무이자 할부 정책, 가계별 현금 지급 등 포퓰리즘 정책도 추진했다.

5월3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이 페소 지폐를 세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물가상승률이 가장 높은 국가로, 페소는 달러 대비 지속적인 평가절하를 겪고 있다. ⓒ
5월3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이 페소 지폐를 세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물가상승률이 가장 높은 국가로, 페소는 달러 대비 지속적인 평가절하를 겪고 있다. ⓒAFP 연합

‘매트리스 밑’ 달러 자산 50%나 증가

앞서 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의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는 방법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정부의 무분별한 페소 남발의 결과는 결국 사회적 비용이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되돌아왔고, 아르헨티나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대비 108.8% 오르며 199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이렇듯 인플레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정부는 살인적인 인플레를 잡기 위해 5월15일 중앙은행을 통해 올해 들어서만 벌써 네 번째로 기준금리를 올려 97%의 인상안을 단행했다. 즉 아르헨티나 로컬 은행에 100페소를 정기예금으로 예치하면, 후에 197페소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인상안까지 단행하는 정부의 노력에도 여전히 아르헨티나인들은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페소보다 더 안정적인 달러 자산을 보유하는 것을 선호한다. 아르헨티나 국립통계청(INDEC)에 의하면, 지난해 3분기 아르헨티나인들의 ‘침대 매트리스 밑의 달러’(해외 은닉 자산 및 현지 은행 시스템에서 확인되지 않는 달러) 자산은 약 2억6149만 달러로 추정되며, 5년 전보다 ‘매트리스 밑’에 숨겨둔 달러 자산은 50%나 더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아르헨티나 현지 경제 전문가들은 만성적인 인플레와 더불어 경제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가뭄으로 인한 농업생산량 감소 탓이다. 여전히 1차 산업인 농목축업이 주요 수출산업인 아르헨티나는 수출액 기준 세계 11위 농축산물 수출국이다. 대두 및 대두 가공품과 축산물 등을 수출하며 농축산물은 전체 수출액의 약 60%를 차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르헨티나에 닥친 가뭄은 상당한 영향을 미쳐 올해 농축산물 수출이 최대 200억 달러 감소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는 외환시장에 큰 타격을 미쳐, 현지 달러 시장을 메마르게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둘째는 정부의 환율 통제 정책의 부작용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해외로 유출되는 국민의 달러를 막고 현지 외환시장을 통제할 목적으로 다양한 달러 환율을 계속 공표하고 있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볼 수 있는 환율을 현지 경제 전문지 ‘암비토’의 환율 목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부 공식 달러, 중앙은행 달러, 관광객 달러(외국인 관광객 환율), 카타르 달러(2022 카타르월드컵 때부터 시행된 것으로 해외여행 시 지출 환율), 콜드플레이 달러(지난해 10월 영국 록그룹 콜드플레이의 아르헨티나 공연 시기부터 시행된 것으로 해외 아티스트의 현지 문화예술 공연 시 페이 및 해외 송금에 적용되는 환율), 블루 달러(암시장 환율처럼 형성된 자유 달러) 등등의 다양한 환율이 존재한다. 또한 정부는 국민이 마음대로 달러를 구매할 수 없도록 1인당 월 200달러 매입 상한제를 두었다. 페소 약세와 환율 통제 정책은 암달러 시장의 활성화를 부추겼고, 현재 블루 달러의 시세는 정부 공식 시세보다 늘 2배 정도 높은 부작용만 낳았다.

셋째는 수입업체들의 타격이다. 이미 아르헨티나 시장의 외환 부족은 경제의 투자와 성장을 저해하고 있는데, 정부가 외환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환율 통제 정책은 더욱더 수입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이는 원자재 수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 결국은 내수경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립통계청에 따르면 이런 영향은 지난해 4분기 산업활동을 2% 하락시켰다고 발표했다.

 

불투명한 정치 상황도 한몫

넷째, IMF와의 조정 및 부채 상환 딜레마 문제다.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치고 있는 현 상황에서 IMF와의 부채 조정과 상환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월 구제금융 4차 중간 협상에서 아르헨티나 협상단은 외환보유고 유지 조건 완화에 합의했음을 밝혔다. 당초 IMF와 아르헨티나는 매 분기 외환보유고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가뭄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고 있는 상황을 IMF가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이전 중도우파 정부 때인 2018년, IMF로부터 570억 달러 규모(약 69조원)의 금융지원을 받았다. 2034년까지 상환해야 하며, 이는 IMF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금융 지원이었다. 올해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전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경제 활성화는 물론 IMF용 상환 외환 준비금 축적이라는 목표까지 달성해 나가야 한다. 이미 국제 금융시장에서 낮은 신뢰도를 보이고 있어 아르헨티나가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다고 경제 전문가들을 보고 있다.

다섯째, 불투명한 정치 상황이다. 아르헨티나는 10월22일 대선을 앞두고 있다. 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공표한 상태다. 경제 전문가들은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재정 적자, 통화 팽창, 인플레이션, 외환 보유 최저, 수많은 종류의 환율 등 경제난과 치안 부재 및 빈곤 퇴치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암울한 것은 이런 문제들의 실질적인 해결 시나리오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다. 현 페르난데스 정부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달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지난 4월부터 중국과의 교역에서는 위안화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브라질과는 공동 통화를 논의 중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기 어려울 것이란 견해가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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