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과 정치판이 같다고?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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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이 장안의 화제다. 궁중 음식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서 이제는 드라마를 정치 코드로 읽어내는 시청자들까지 생겼다. <대장금>과 현실 정치는 어떻게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낳고 있는가.
이같은 비교는 인터넷 사이트에 처음 등장한 뒤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11월25일자 방영분에서 경합 결과에 불복하는 수랏간 나인들 때문에 손발이 묶인 한상궁이 “재경합을 치르게 해달라. 대신 내가 이기면 전권을 달라”며 대왕대비와 담판하는 장면이 나오자, 이런 해석은 더욱 인기를 얻었다. 재신임으로 정국을 돌파하려는 노대통령의 태도와 흡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반응에 대해 드라마 제작진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곧이어 시청자들의 구성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병훈 PD는 “솔직히 ‘그대로 좀 따라가 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웃음), 드라마는 드라마의 길이 있다. 앞으로 그렇게 대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34~35쪽 인터뷰 참조).

이런 해석이 등장하기 전에도 장금이와 한상궁은 남다른 상징성을 부여받고 있었다. 한상궁 같은 리더가 없을까, 장금이 같은 인재가 없을까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한상궁은 단박 히딩크 급의 리더로 떠올랐다. 동양인재개발원 정경희 팀장은 요즘 한상궁을 모델로 기업 간부들에게 코칭의 중요성을 교육하고 있다.

“대대로 최고 상궁을 배출해온 집안 출신인 최상궁은 자기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상찬 나인인 금영(홍리나)에게 그것을 따라 하라고 가르친다. 반면 한상궁은 기존 지식을 전수하기보다는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독려한다. 현대 조직에서 필요한 인재는, 호기심 많고 창의적인 장금이와 같은 인물이다. 그런 인재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데는 한상궁의 코칭법이 제격이다”라고 정씨는 말한다.


드라마에서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한상궁이 미각을 잃은 장금에게 “머리 속으로 맛을 그려보거라.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독려하는 대목이다. 한상궁뿐 아니다. 가까스로 출궁을 면하는 대신 다제헌(약초를 재배하는 관청)으로 쫓겨난 장금이 보여주는 태도는, 한 개인이 어떻게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본으로 삼을 만하다고 정씨는 말한다. 급기야 장금의 굳은 의욕은, 술먹고 밭고랑에서 낮잠자는 것이 일이던 다제헌 사람들을 감화시키기에 이른다.

여성계는 여성계대로 <대장금>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여성상에 환호한다. 장금-한상궁-정상궁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사슬이 여성들의 연대 의식과 바람직한 멘터십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목표는 훌륭한 직능인이 됨으로써 제 몫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기예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상궁은 장금을 엄히 가르치면서 어미와 스승 역할을 두루 해내고, 정상궁은 어린 장금을 할머니처럼 자애롭게 품어준다. 정상궁은 매사에 너무 똑부러진 한상궁에게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라고 훈수한다. <대장금>은 작정하고 그저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독한 여성’이 아니라 여인들이 올바른 성공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3대에 걸쳐 유장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멋진 남성이 등장했어도 자기 일이 최우선인 장금의 모습이나, 장금의 어머니인 명이와 한상궁이 주고받는 돈독한 우정도 인기 요인이다. 기존 사극의 부정적인 여성상에 물릴 대로 물린 여성 시청자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사극 최초의 여성 작가로 불릴 법한 작가 김영현씨(37)의 몫이 커 보인다.

패러디 <대잠금>도 등장

그러고 보니 갈피갈피 너무 교훈적인 것이 아닐까? 이런 염증을 느끼는 시청자도 있는 모양이다. 혹 <대잠금>이라고 들어보았는지? 이 패러디 콩트 안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망가진다. 한상궁은 궁에서 도망가려고 담 밑을 주걱으로 파헤치다가 뜻밖에 광천수를 발견해 횡재한다. 혜택은 악인이라고 비켜가지 않는다. 너도나도 광천수를 퍼가자 광천수의 혜택을 후세가 누릴 수 있도록 물길을 막는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대 ‘잠금’. 짓궂은 패러디에서조차 <대장금>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현실에서라면 ‘장금이는 왕따 1순위’라는 설문 조사 결과도 흥미롭다.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장금이 같은 직원이 있다면 왕따를 당할 것’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장금이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상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결과를 ‘개혁은 어렵다’로 읽어야 할까, ‘훌륭한 사람은 부담스럽다’로 해석해야 할까?
"대본을 받아든 순간, 이거 말이 좀 나겠구나 싶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방영 10주 만에 시청률 50%를 돌파한 문화방송 <대장금>(월·화 밤 9시50분) 연출자 이병훈 PD의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장안은 온통 <대장금>이 화제다. 이 드라마가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이런 저런 ‘대장금 신드롬’을 낳고 있다. 방영 초기 궁중 음식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것이 신드롬의 첫 번째 단계다.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대장금> 신드롬은 의외의 방향으로 물꼬가 트였다. 한상궁이, 주인공인 ‘명랑 소녀 장금이’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한상궁 리더십’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17회쯤에서 죽기로 되어 있던 그녀가 27회에 가서야 퇴장한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브라운관에서 한상궁을 계속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그런 한상궁이 최고 상궁에 오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펼쳐지면서 이번에는 또 다른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드라마를 정치 코드로 읽어내는 시청자들이 생긴 것이다. 사극 <용의 눈물> 등 이전에도 왕왕 현실 정치와 빗대보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격이 좀 다르다.

일부 시청자의 눈에는 뒤늦게 수랏간 최고 상궁 자리에 오른 정상궁(여운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고 상궁 자리에 올랐으나 수랏간 나인들이 ‘천민 출신을 최고 상궁으로 모실 수는 없다’고 따돌려 어려움을 겪는 한상궁(양미경)은 노무현 대통령이, 부드러우면서도 의지가 굳은 장금이 이영애는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오버랩된다는 것이다.

<대장금> 신드롬, 정치판에까지 번져

게다가 대장금의 듬직한 후원자이자 은밀히 정경 유착의 고리를 파헤치고 있는 민종호 종사관(지진희)은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으로, 자격과 정통성을 내세우며 사사건건 한상궁과 각을 세우는 최상궁(견미리)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로 비유되기도 한다. 최상궁의 울타리가 되는 제조상궁과 오겸호 대감은, 각각 보수 언론과 재벌 세력을 대변한다는 그럴듯한 분석도 뒤따른다.

이들이 정상궁을 김대중 대통령과 겹쳐 보는 까닭을 들으면 정말 제작진의 치밀한 포석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우선 정상궁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권력 투쟁에서 밀려 한직을 전전하다가 뒤늦게 최고 상궁에 올라 입지전적 인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는 역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역병에 걸렸다는 모함에 빠져 궐 밖으로 내쳐진 뒤 “왜 내가 여기로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의아해 한다. 시청자들은 이를 보며 김대중 대통령이 매카시즘 광풍에 시달린 것을 연상한다. 심지어 관절염으로 다리를 저는 것 또한 다리가 불편했던 김 전 대통령과 유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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