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4개 회사 파업 유도했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9.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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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 조폐공사·현대중공업·만도기계·서울지하철 분규에 적극 개입 주장
진형구 전 대검찰청 공안부장이 문제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을 한 6월 7일 점심께 김창근 한국중공업 노조위원장은 창원지검에 자진 출두했다. 지난 3∼5월 한국중공업 민영화에 반대하는 각종 불법 시위를 주도한 혐의에 대해 수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김위원장은 6월8일 진부장의 취중 발언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태정 법무부장관을 해임하겠다는 청와대 발표가 있을 무렵 검찰에 구속되었다.

김위원장이 구속되자마자 한국중공업 노조원 4천5백여 명은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민주노총 한 관계자 말마따나 ‘위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이유로 파업을 벌일 수 있는 사업장은 전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이 경제난 이후 노동운동계가 처한 현실이다.

그러나 ‘조폐공사 파업 유도’ 파문 이후 상황은 180。 바뀌었다. 한국중공업 전대동 노조 부위원장은 땡볕 더위에서도 날마다 1천5백 명 이상이 집회에 참가하는 등 ‘파업 분위기가 떴다’고 말한다. 이유는 한 가지. ‘한국중공업은 제2의 조폐공사’라는 구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위원장을 구속하면 노조가 극한 투쟁에 돌입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태에서 검찰이 일부러 노조를 자극했다는 것이 조합원들의 인식이다. 김위원장을 고소한 현대중공업은 조업 차질을 우려해 8일 오전 창원지검에서 있었던 영장실질심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피고소인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받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만도기계 또한 ‘제2의 조폐공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조폐공사가 공기업 구조 조정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면 만도기계는 민간 부문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 만도기계 김학렬 아산지부장의 주장이다. 만도기계는 김대중 정부가 파업 현장에 대규모 공권력을 투입한 첫 사업장이다. 이들이 파업 유도에 말려들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

△98년 2월 ‘인위적인 감원을 하지 않는다’는 고용합의서를 노사가 체결하고 지속적인 교섭을 벌이던 중 7월 말 회사측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일방적인 정리 해고를 통보한 점 △교섭 기간에 교섭위원 전원에 대해 구속 및 체포 영장을 발부한 점 △회사측이 공권력 투입을 공식 요청한 일이 없는데도 병력이 투입된 점이 그것이다.

서울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은 지난 4월 총파업 기간 내내 검찰이 강경 기조를 주도하면서 노조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한다. 총파업에 돌입하기 전부터 검찰이 ‘파업 지도부 전원 구속 수사 및 조기 진압 방침’을 천명하고, 총파업 기간에는 공안대책협의회를 열어 ‘4월21일 밤 12시까지 복귀하지 않은 노조원은 직권 면직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지하철공사 인사 문제에 간여하는 월권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도 투쟁’ 감행한 강성 노조 죽이기

제2의 조폐공사를 자처하는 이들 사업장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이들은 노·사·정 관계의 전환점에서 이른바 ‘선도 투쟁’을 감행한 강성 노조들이었다. 다시 말해 정부 처지에서 보자면 ‘본보기’로 다루어야 할 노조였던 셈이다.

지난해 8월 현대자동차 파업 사태에서 보인 갈팡질팡식 대응으로 도마에 올라 있던 정부는 만도기계 파업을 계기로 확실한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조폐공사는 정부가 ‘공기업 구조 조정 계획’을 확정 발표한 지난해 8월4일 직후 가장 큰 규모로 파업한 공공 부문 사업장이었다. 지하철공사는 올 봄 노동계가 예고한 ‘4∼5월 총파업’의 전위 부대나 다름없었다. 한국중공업은, 올 들어 민주노총 산하 전국금속산업노동조합연맹(금속노련)의 투쟁 방침을 충실하게 수행한 핵심 사업장이었다. 더욱이 한국중공업은 95년 40일간 총파업을 벌인 이래 5년 가까이 큰 파업을 벌인 일이 없어 영남 지역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충분한 ‘전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이들 4개 사업장에서 파업 상황이 악화한 전후에 검찰이 끼어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검찰은 지하철공사 파업 기간에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공안대책협의회를 통해 파업 상황에 개입하며 노조원들을 자극했다. 조폐공사 옥천 조폐창에서 기계를 철거하기 이틀 전인 12월1일에도 검찰은 공안대책회의를 열었다. “파업 유도는 5·18 쿠데타 못지 않은 반역죄”

사실 노동계에서 파업 유도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사용주가 일부러 교섭 현장에 나타나지 않거나 노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거는 식으로 파업을 유도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고 금속노련 경남지역본부 김정호 교육부장은 말한다. 파업을 유도한 다음 지도부를 고소·고발하는 일종의 ‘노조 무력화’ 전술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사업장 통폐합이라는 대담한 방식으로 파업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이번 파문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번 국정조사는 조폐공사 파문뿐 아니라 의혹이 제기된 사건 전반을 철저하게 파헤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번 국정조사를 앞두고 △파업 유도 진상 규명 △일방적 구조 조정 철회 △공안대책협의회 해체를 요구하며 총력 투쟁을 선언한 상태이다. 시민단체들은 파업 유도 의혹을 법정 싸움으로까지 끌고 갈 계획이다.

구속된 조폐공사 노조위원장 강승회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김연수 변호사(대전·충청 지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는, 파업 유도를 공모한 혐의가 있는 세 사람(김태정 전 법무부장관·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강희복 조폐공사 사장)과 국가를 상대로 물질적·정신적 피해 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검찰이 직권을 남용한 것은 5·18 쿠데타에 못지 않은 반역죄’라는 것이 김변호사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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