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인력 시장
  • 李興煥 기자 ()
  • 승인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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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후 중동에서 신흥공업국으로 중심 이동…‘이주 노동자 인권’ 숙제로
네팔 경찰 공무원의 평균 월급은 9만원이다. 네팔 출신 산업기술연수생이 한국 중소기업체에서 받을 수 있도록 책정되어 있는 합법적인 월급 액수는 2백10달러, 즉 16만8천원 정도이다. 경찰 공무원 월급의 거의 2배에 가깝다.

네팔은 절대 농지가 국토의 10%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일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이다. 네팔 출신 용병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일자리와 고임금은 네팔인의 노동력을 유인하는 첫째 요인이다.

불법 체류 1년8개월째이면서 네팔인 브로커 S씨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는 네팔인 M씨는“네팔 남자들은 13세만 되면 외국에 나가 일하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70년대에 오일 달러를 쫓아 중동으로 몰렸던 네팔의 젊은이들은 이제 다시 ‘코리안 드림’을 꾸고 있다.

‘국제 품팔이’‘노동 기계’‘노동 난민’‘막일꾼’ 등으로 불리는 아시아의 노동력은 집단으로 국경을 넘나든다. 대부분이 건설 현장을 찾거나, 부품을 조립하고 가사를 대신하는 단순 노무자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는 것도 아시아 인력 시장의 특징이다.

싱가포르의 건설 현장에는 태국 노동자들이 우글거리고, 태국의 건설 노동자들은 대만에서 월 5백달러를 벌 수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전체 노동 인구의 21%인 약 30만명이 필리핀 등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다.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인력 송출국이기도 한 말레이시아에는 수입 외국인 노동자가 무려 백만명이나 상주하고 있다. 홍콩 가정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가정부만 해도 9만명에 달한다.

일본도 외국 인력의 주요 수입국이다. 94년 말 현재 한국인을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는 약 70만명 규모이며, 이 중 불법 취업자는 무려 30만명으로 추산된다. 서비스·토목·건축·주물 등 노동집약적인 제조업과 해외로 이전하기 불가능한 산업에 외국인 근로자가 집중되어 있다.

한국, 일본에선 불법 체류자 최다국

일본 이민국 통계에 따르면, 92년 5월 현재 입국사증(비자) 기한이 만료되어 일본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은 남자가 2만2천3백12명, 여자가 1만3천3백75명이나 된다. 일본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주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며,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 사람보다 많아 불법 체류자 최다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콩에 본부를 둔 아시아이주민센터(AMC)는 94년 말 아시아의 이주 노동자 수를 약 1천3백만명으로 추산한다. 불법·합법 이주자를 모두 포함한 수치다. 이 수치에는 정치 난민도 포함되어 있지만,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일자리를 찾아 흘러다니는 철새 근로자와 다를 바 없다.

한국·일본·대만에서는 아시아 지역의 이주 노동자들을 ‘외국인 노동자’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홍콩 싱가포르 등 기타 지역에서는 아예 이주민(migrant)이라고 표현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기피하고 경계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실체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에서 이주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이다. 중동의 오일 달러가 서아시아 국가와 다른 중동 국가들의 노동력을 유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유 생산국들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에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한데, 수입 노동력 외에는 노동 시장의 수요를 메울 길이 없었다.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해외인력처(POEA)의 J.N.사르미엔토씨는 이를 한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태국 필리핀 등 ‘제3 세계로부터의 극적인 인력 수입’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83~86년 4년 사이에 중동 지역의 건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난 후 미숙련 단순 노무자에 대한 수요는 80년대 초의 38%에서 4%로 급격히 떨어졌다.

8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신흥공업국가가 새로운 노동력 흡입 지역으로 떠올랐다. 대기 상태에 있던 이주 노동자들로서는 70년대의 중동 산유국보다 훨씬 매력적인 곳이었다. 더구나 신흥공업국들은 출산율이 떨어지고 경제 활동 인구가 감소했다. 임금은 높아졌고 싱가포르 등은 적극적으로 노동력 수입 정책을 폈다. 노동력을 유인하는 최적 조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경제구조 재편 과정을 거치면서 저개발국의 노동력은 아시아 선진국으로 대량 흡수되었다.

그러나 노동력 이주는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 바로 인권 문제이다. 이주 노동자는 노동 시장에서 최악의 조건과 최저 임금으로 수입되는 ‘현대판 노예’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이기 이전에 상품으로 거래되면서, 노동력 수입 국가가 효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을 때는 언제든지 출국시켜 버릴 수 있는 ‘노동 부품’으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주 노동자는 정치적 시한 폭탄”

홍콩의 아시아이주민센터가 발행하는 한 자료는 이제 이주 노동자들이 ‘정치적 시한폭탄’으로 등장했다고 지적한다. 강제 추방·체포·학대 등 인권 유린 문제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실을 자각하고 단결을 꾀할 경우 폭발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이주민국의 패트릭 타란씨는 ‘냉전 종식과 걸프전 이후 새로 등장한 세계적 혼돈의 하나가 바로 이주민 문제이며, 지구촌 딜레마의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노동력 이주는 아시아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지구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 같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노동력은 지금도 미국으로 흘러들고 있고, 호주와 뉴질랜드를 향한 태평양 연안국 노동자들의 이주 대열도 점차 늘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종족 분쟁도 경제 난민을 양산하고 있다. 전쟁을 피해 지역간 이동을 하는 난민들은 결과적으로 노동력 이주형태를 띠는 것이다,

국제 노동인구 전문가들은 한국이 앞으로도 약 10만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할 것으로 예측한다. 일본은 백만명 선이다. 이주민들의 일본 입국이 현재처럼 어려울 경우 이주민들은 한국을 경유지로 겨냥할 것이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체는 이‘노동자 무역’이 좀더 자유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인력 송출 기관이나 불법 브로커들이 군침을 흘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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