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정권 '언론 대첩' 루비콘 강 건너다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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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재창출 최대 분수령' 인식, 여권 총동원령


DJ 정부 대 언론간 '세전(稅戰)'이 어느 한쪽도 물러설 수 없는 사생결단 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언론 개혁을 통해 정권 재창출을 노리는 민주당, 조·중·동 껴안기로 정권 교체를 이루려는 한나라당, 그 틈새에서 각자 제 살 길을 찾고 있는 언론계의 생존 전략을 공개한다.


이번에 밀리면 다 죽는다.' 언론사 세무 조사 발표 이후 여권의 분위기는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 가뜩이나 DJ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의 코털을 뽑았으니 완벽하게 승리를 굳히지 않을 경우 정권 재창출은 물 건너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생사를 건 만큼 여권 핵심부터 중·하위 당직자에 이르기까지 비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한 당직자는 집권 이후 최고의 긴장 상태라고 상황의 긴박성을 묘사했다.




언론과의 '세전(稅戰)'을 치르면서 여권이 내세우고 있는 핵심 구호는 '일사불란'이다. 난리가 났는데, 내부에서 딴말이 나오면 전열 전체가 흐트러진다는 우려에서다. 이 때문에 여권 핵심부는 그 어느 때보다 '입 단속'에 치중하고 있다.


청와대는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박지원 정책기획수석과 박준영 대변인이 '언론사 세무 조사는 법과 원칙에 따라 추진한 것이며, 국세청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세무 조사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말고 알 수도 없다는 것이 내부 정서라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뻥'이라고 못박았다. 청와대가 언론사 세무 조사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원칙론만 되풀이하는 것은 '정략'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피하려는 의도다.


차기 주자들 앞다투어 선봉에 나서


청와대 대신 주력 부대로 나선 민주당에서는 모처럼 계파를 떠나 노·장·청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중권 대표는 연일 '단합'을 외치고 있고, 최고위원을 비롯한 지도부도 야당의 정치 공세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조순형·장영달 의원이 주도하는 '여의도 정담'이나 정풍운동을 주도했던 바른정치모임 역시 신속하게 투쟁 의지를 천명했다.


이런 단합을 이끌어낸 주역은 바로 DJ다. 사실 세무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정가에는 설마 DJ가 세무 조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까발리겠느냐는 관측이 많았다. 내년 대선을 제대로 치르려면 DJ가 어떤 식으로든 언론과 타협하고 가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망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DJ는 타협 대신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DJ의 한 핵심 측근은 "김대통령은 세무 조사 착수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보수적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해야 한다'는 온건론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지만, 한마디로 씨알이 안 먹혔다는 것이다. 때문에 언론계의 불만 접수 창구 노릇을 하지 않을까라는 의혹을 샀던 청와대의 한 수석도 이번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이렇듯 DJ가 강공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언론 개혁은 국민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언론을 개혁하지 않고는 무슨 수를 써도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옷 로비 사건·햇볕정책·노벨평화상 수상 등에 대한 언론의 '왜곡 보도'와 함께 DJ를 자극한 또 한 가지 사례를 귀띔했다. 청와대가 얼마 전 어린이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놀랍게도 90%에 이르는 어린이가 정부의 대북 정책을 '퍼주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DJ가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했을 법하다.


김대통령은 '전쟁 선포'와 함께 여권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바른정치모임 초대 회장을 맡았고, 지금도 이 모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은, 세무 조사 결과 발표 직후 DJ로부터 "쇄신도 좋지만 이런 때 바른정치모임이 앞장서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DJ의 의중은 즉각 전회원에게 전달되었고, 소장파의 판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대통령으로서는 더 물러설 수 없는 외길에 서 있는 만큼 소속 의원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참전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DJ가 총동원령을 내리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쪽은 차기 주자군이다. DJ가 언론과의 전쟁을 최후의 승부수로 여기고 있는 만큼 이 대목에서 점수를 확실하게 따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런 때 언론에 잘 보이려고 어물거리다간 낭패를 볼 것이라면서, 청와대가 차기 주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현재 세전(稅戰)의 선봉장은 한화갑 최고위원과 노무현 고문이다. 그동안 신중히 처신해온 한위원은 이례적으로 이회창 총재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적극성을 띠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DJ와 만나는 기회가 많았으므로, 그의 행보가 DJ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언론 비판이 전공인 노무현 고문은 물을 만난 격이다. 그는 이른 바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을 두둔하는 이회창 총재에게 '타락한 보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6월23일 DJ가 주관한 고문단 오찬에서도 그는 가장 강경한 톤을 유지했다. 노고문측은 "언론 개혁이 DJ의 마지막 승부수가 되리라는 점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라면서, 당내 경선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결국 이번에 최대의 전공을 세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DJ와 여권 개혁 세력으로부터 개혁성을 의심받고 있는 김중권 대표 역시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미지를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그동안 개혁 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머뭇거리거나 주춤하면 다 죽는다"라면서 줄곧 단합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곤혹스런 주자는 이인제 최고위원이다. 그는 올 봄 대표 연설 때 언론을 비판했다가 곧바로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여권에서는 이위원의 태도에 관심이 쏠려 있다. 한 당직자는 이번에도 어영부영한다면 당원들로부터 먼저 호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기류를 의식한 이위원 주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언론과 척지지 않기 위해 몸을 빼다가는 당과 국민으로부터 왕따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가 "세무 조사는 조세 정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야당이 정치 쟁점화를 시도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라고 거들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여권 지도부는 언론과 야당을 겨냥한 공세를 잠시 늦추는 모양새다. 세무 조사가 지나치게 정쟁으로 비화할 경우 여권에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다. 그러나 언론사나 사주에 대한 검찰 고발을 기점으로 차기 주자들의 점수 따기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반DJ 언론의 보복으로 사상자 나올 것도 각오"




총동원령에 이어 여권 내부에는 최근 '언론 보복 경계령'이 떨어졌다. 궁지에 몰린 언론사들로부터 보복성 표적 보도가 예상되니 몸조심하라는 내용이다. 동교동계 김옥두 의원은 "탈세 액수가 큰 일부 신문사가 특별취재반을 만들어 대통령 친인척과 동교동계 주변을 집중적으로 뒤진다는 정보가 있다"라고 말해 경계령이 떨어졌음을 뒷받침했다. 차기 주자 진영에서는 '주자들의 병역·정치자금에서 소소한 가정사까지 이 잡듯이 조사하고 있다'는 괴담까지 나돌고 있다. 실제로 1999년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구속되었을 때 〈중앙일보〉는 김한길 정책기획수석의 '별장 불법 건축' 문제를 물고늘어진 적이 있다.


여권에서는 앞으로 적지 않은 '사상자'가 나올 것을 각오하고 있다. 김중권 대표는 "부당한 공격이라면 모를까, 비리가 드러날 경우 여권이 나서서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이다. 각자 알아서 책잡힐 일을 피해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언론 개혁 제도화→정권 재창출'이 최종 목표


언론사 세무 조사로 촉발된 DJ 정권 대 언론의 대결은 당분간 언론과 정권이 서로를 발가벗기는 이전투구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과연 그 끝이 어디냐는 것이다.
여권이 설정하고 있는 결말은 두 갈래다. 하나는 언론 개혁 제도화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한 정권 재창출이다.


언론 개혁 제도화는 언론에 대한 비판 여론을 등에 업고 각종 언론 관련 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편집권 독립과 사주 지분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정기간행물법 개정이 핵심이다. DJ는 이미 연두 기자회견에서 언론 당사자와 언론·사회 단체, 학자, 정치인 들이 언론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다. 정부는 빠지고 국회와 시민단체 등을 지렛대 삼아 언론 개혁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다. 언론사 세무 조사 결과 발표 후 박지원 수석은 "언론 개혁은 국회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DJ의 방침을 재확인했다.


언론단체와 학자 들은 벌써부터 언론 개혁을 제도화하라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언론학자 1백7명은 6월22일 '신문 개혁을 촉구하는 전국 언론학자 107인 선언식'을 열어 △세무 조사 및 불공정거래 조사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 △국회 언론발전위원회 설치 △정기간행물법 개정 등을 촉구했고, 언노련을 비롯한 언론단체들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문광위원은 곧 국회 차원의 언론 개혁 논의에 발동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 개혁을 통한 정권 재창출 시나리오는 더 전략적이다. 언론 개혁에 호응하는 방송과 일부 신문을 적극 포용하고, 이른바 신문 빅3인 '조·중·동'은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것이 골자다. 여권의 한 전략가는 "여론에 대한 영향력은 방송이 신문을 압도한다. 따라서 방송이 여당을 지지하고 일부 신문이 반DJ 신문을 견제할 경우, 결국 여론이 여권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에 희망이 보인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미 방송 3사와 조·중·동을 제외한 대다수 신문은 여권의 처지를 대변하는 쪽으로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여권에서는 언론사 사주 고발을 계기로 〈중앙일보〉가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완전히 갈라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머지않아 KBS와 MBC의 사령탑이 충성심 강한 친정부 인사로 교체되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내년 대선을 겨냥한 진용 정비 차원이라는 것이다. 개혁성이 강하지만 여권이 다소 껄끄럽게 생각하는 MBC 김중배 사장은 내년 4월 임기가 끝나고, 4년째 KBS를 맡고 있는 박권상 사장에 대해서는 방송위원장 영전설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내부 단결-언론 개혁-정권 재창출로 이어지는 여권의 장밋빛 기대가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른바 반DJ 언론의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차기를 둘러싼 여권 내 권력 갈등 과정에서 수구 언론과 결탁하려는 세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벼랑 끝에 몰린 반DJ 언론은 사력을 다해 여권의 재집권을 막을 것이다. 지금은 민심이 여당 편이라고 해도 언제 180° 바뀔지 모를 일이다"라고 경고했다.


언론사 세무 조사로 촉발된 '언풍' 정국은 일단 '방송과 언론 개혁에 호응하는 일부 신문을 앞세운 민주당' 대 '조선·동아로 대표되는 이른바 반 DJ 신문을 등에 업은 한나라당'의 피할 수 없는 한판 대결로 요약된다. 최종 승부는 결국 누가 민심을 얻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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