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의 승부수 ‘음모론’
  • 이숙이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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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지원설, 영남에선 먹힌다”…막판에는 ‘탈당 명분’ 삼을 수도


유종근 후보가 사퇴하면서 권력 실세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호남 후보도 사퇴 대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후 그의 ‘예고’대로 한화갑 후보가 주저앉았다. 광주 경선 직전 SBS와 <문화일보>가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해 분위기를 띄우더니, MBC·KBS도 잇달아 비슷한 여론조사를 실시해 ‘노풍 몰이’를 거들고 있다. 반면 이인제 후보에게는 악재만 속출하고 있다. 울산 선거를 총괄했던 김운환 전 의원이 느닷없이 체포되더니, 김기재 선대본부장도 검찰 출두설에 시달리고 있다.


그동안 이인제 후보측이 제기한 이른 바 ‘음모론’의 주요 내용이다. 요컨대 최근의 노무현 돌풍은 노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의 작품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은 최종적으로 김심, 즉 김대중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다.


한동안 이인제 후보의 참모들을 통해서만 회자되던 음모론이 이후보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온 것은 충남 경선을 전후해서다. 이후보는 3월23일 충남 경선장에서 “대통령 측근이 경선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면 중대한 문제이다”라며 음모론을 공식 제기했다. 그 전날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노무현 후보에게 “박지원 특보와 2월19일과 27일 만난 적이 있느냐”라고 질문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후보 진영에서는 ‘김심’ 전달자로 박지원·김한길·임동원 트리오를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음모론에는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한 예로 유종근 후보가 처음 음모론을 제기했을 때의 주인공은 오히려 이인제 후보였다. 이후보로 하여금 호남에서 몰표를 얻게 하려고 권력 실세가 나서 호남 후보들을 차례로 낙마시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박지원 특보는 유후보가 지목한 권력 실세 중에도 포함되었다.


한화갑 후보의 사퇴가 ‘김심’때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동교동 신파와 쇄신파 사이에서는 일찌감치 한후보가 당권으로 돌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권 후보도 중요하지만, 당권과 대권의 성격이 다르면 본선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한후보가 개혁 당권을 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전 경선장에서 만난 문희상 의원은 “한후보도 주위의 주장에 공감했지만 ‘한번만 더 까보자’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광주 경선 직후 바로 사퇴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라며 아쉬워했다. 결국 한후보의 사퇴는 당권으로 선회하라는 주변의 건의와 광주 경선의 패배 탓이지, 외압 탓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체가 뿌옇다 보니 음모론에 대한 역풍이 만만치 않았다. 이후보는 충남과 강원 경선장에서 음모론의 증거를 내놓으라는 추궁을 당했다. ‘노풍 몰이’에 동원되었다고 거론된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도 이후보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음모론은 외부 반발뿐 아니라 이후보 진영 내부에서도 갈등을 낳았다. 이후보를 지지해온 동교동 구파가 ‘김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발하자, 국민신당파 역시 동교동 구파가 득표에 별 도움도 안되면서 이후보 이미지만 나빠지게 만들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나선 것이다. 동교동 구파는 ‘이후보가 자꾸 청와대와 DJ를 겨냥하면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며 불쾌한 반응이고, 국민신당파 역시 이 기회에 아예 동교동 구파와 결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맞섰다. 당초 강원 경선에서 ‘엄청난 것’을 터뜨릴 것처럼 별렀던 이후보가 아예 음모론의 ‘음’자도 꺼내지 않은 것은 이런 캠프 안팎의 역풍을 의식한 탓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 음모론이 3월25일 김중권 후보가 전격 사퇴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김후보는 “대구·경북에서 지역 감정을 볼모로 잡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라고 사퇴 이유를 밝혔다. 일각에서는 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내부 여론조사 결과가 매우 실망스러워 명예롭게 퇴진하는 길을 택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이후보측은 10%대 지지를 얻으며 선전하던 김후보가 갑자기 사퇴한 데는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며 강력하게 문제 삼을 태세다.


이후보 진영이 이렇듯 음모론에 매달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영남 지역을 돌파하기 위한 승부수로 유용하다는 것이 이후보측의 판단이다. ‘노무현은 DJ의 그림자’라는 점을 집중 부각할 경우, 영남의 반 DJ 정서를 자극해 ‘노풍’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보의 한 참모는 1997년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가 당했던 일을 기억하라고 주문했다. 승승장구하던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YS 지원설’이 나온 직후 곤두박질한 것처럼, 노후보도 ‘DJ 지원설’이 나오는 것만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때 충남 경선 직후 사퇴하자는 의견이 득세했다. 어차피 강원도에서 질 바에야 충남에서 압승한 후 ‘이렇게 높은 지지를 받지만 더 이상 불공정 경선을 치를 수 없다’며 퇴장하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류는 일단 경남까지 가보자는 쪽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이인제 캠프, 김중권 사퇴 후 “탈당 불사”




또 한가지는 최악의 경우 음모론을 탈당 명분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당초 이 ‘탈당 명분론’은 다른 진영에서 더 많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김중권 후보 사퇴 이후 이인제 캠프 내부에서 ‘탈당 불사’를 외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한 참모는 “국민신당 출신에 충청권 의원들까지 합세할 경우 이후보는 1997년 대선 때보다 훨씬 막강해진다. JP와 손이라도 잡게 되면 대권도 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이후보가 충청도를 근거로 YS에게 도움을 청할 경우 YS는 노무현과 이인제를 놓고 고민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는 이후보측 기대만큼 음모론의 파괴력이 크지 않을 것을 예고한다. 응답자의 60.2%가 ‘김심 배후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동의한다는 응답 21.0%는 주로 민주당 경선과 무관한 한나라당 지지층에서 나왔다.


물론 이 조사는 김중권 후보 사퇴 이후의 여론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어서, 이후보의 문제 제기가 강해질수록 음모론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이후보가 탈당을 감행할 경우, 그는 경선 불복 재범이라는 오명을 감수해야 한다.
1등을 달리면서도 ‘음모론’을 승부수로 띄운 이후보의 선택에 민주당 경선의 운명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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