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 패하면 노무현 물러나야”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2.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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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자 40% “후보 사퇴 마땅”…‘DJ와 차별화’에도 부정적


지지도가 연일 미끄럼을 타고 있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선택한 돌파구는 ‘부패 청산 프로그램’이다. 지방 선거 참패를 통해 부패를 청산하지 않고는 민심을 되돌릴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부패 청산 행보는 자연스레 DJ와의 차별화 로 이어지고 있다. 노후보는 ‘차별화’라는 단어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말이 전직 대통령의 인형을 때리고 불태우던 식의 불순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언론이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후보 지지 세력이 주장하는 △김홍일 의원 탈당 △아태재단 사회 환원 △DJ 측근 재·보선 공천 금지 등은 표현 방법만 다를 뿐 전직 대통령과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차별화’나 매한가지다.



당내 비주류와 동교동 출신 일각에서 노후보의 청산 프로그램에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옥두 의원은 “김홍일 의원을 내보려면 나부터 먼저 제명하라”며 반발하고 나섰고, 김의원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민주당 청년 조직(연청) 회장단도 6월28일 김홍일 의원 탈당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권노갑 전 고문의 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동교동 구파가) 정신적 무소속 상태’라고 노후보를 겨냥했다.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후보측은 DJ와의 차별화를 밀어붙인다는 방침이다. 노후보의 한 측근은 “설령 당이 분열될지라도 이번만큼은 밀리면 안된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이번 <시사저널> 여론조사는 차별화 전략이 노후보가 기대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으리라는 점을 보여준다. 응답자들은 ‘노후보의 차별화 전략이 지지도 회복에 도움이 되리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도움이 될 것’ 45.7%, ‘도움이 되지 않을 것’ 48.5%로 부정적인 전망을 더 많이 내놓았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만 긍정적인 반응이 우세했을 뿐 수도권을 비롯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부정적 응답이 훨씬 많았다.





이에 대해 선거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발짝 늦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노후보가 대선 후보로 당선된 직후 곧바로 3김 청산과 정치 개혁 등을 내세웠어야 하는데 너무 미적거렸다는 것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이제는 노후보가 어떤 말로 DJ와의 차별화를 외쳐도 다 ‘작전’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렇게 의리를 강조하더니 노무현도 급하니까 할 수 없구나 하는 냉소도 작용하고 있다”라고 풀이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여론조사는 8·8 재·보선 이후 노후보의 입지가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음을 예고한다. 6·13 지방 선거 참패로 재신임 논란에 휩싸였던 노후보는 8·8 재·보선을 자신이 책임지고 치른 후 다시 한번 신임을 묻겠다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만큼 자기에게 힘을 실어달라는 요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래 봤자 대안이 없는 것 아니냐’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이번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0.4%는 민주당이 8·8 재·보선에서 참패할 경우 노후보가 아예 후보 직에서 사퇴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특히 한때 ‘노풍’의 진원지로 여겨졌던 ‘40대’에서 46.3% 대 45.1%로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이 더 많은 것은 눈길을 끈다.



“걸핏하면 후보 자리 걸고 나오나”



이에 대해 한 정치학자는, 노후보가 걸핏하면 후보 자리를 걸고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신임 문제는 지방 선거 직후 완전히 매듭을 지었어야 하는데, 또다시 ‘재경선’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 경솔했다는 것이다. 노후보가 대통령 후보 직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불만은 당 내부에도 팽배하다. 6월21일 당직자와의 간담회에서 유충종 기조국 부장은 “노후보는 경선을 다시 수용하겠다는 둥 소극적인 발언을 자제해 달라. 그런 말을 들으면 후보가 도대체 뛸 의욕이 있는지 의심이 들고 지지를 결속하기보다 이완한다”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노후보가 지지도 회복을 위해 채택한 DJ와의 차별화 전략은 8·8 재·보선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민주당이 또다시 참패할 경우 노후보 사퇴론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이다. 노후보에게 유리한 대목은 이인제 의원의 행보에 대해 ‘민주당에 남아 노후보를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56%나 된다는 점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노후보에게 정녕 솟아날 구멍은 없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노무현의 장점을 살려 승부를 걸라’고 주문한다. DJ의 그림자가 아무리 짙고 넓어도 노후보가 강력한 빛을 발휘하면 자연스레 그 그림자가 걷히게 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한때 노후보의 장점으로 여겨졌던 솔직 담백함과 직설적 화법, 서민 출신이라는 점이 지금은 모두 ‘경솔하고 불안정하고 포용력 없게’ 보이는 약점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치밀하지 못한 후보 일정 관리는 노후보의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기는커녕 정반대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6월28일과 29일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6월28일 저녁 프레스센터에서는 세계신문협회 회장에 취임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축하연이 열렸다. 언론계는 물론 각계 여론주도층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였고, 대통령도 한때 참석을 고려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날 오전까지 노후보 일정에는 이 행사가 빠져 있었다. ‘의례적’ 행사에 꼭 가야 하느냐 하는 배타적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반면 6월29일 무주에서 열린 ‘노사모’ 창립행사는 노후보 일정 우선 순위에 올랐다. 주변에서 노사모와 자주 어울리는 것이 지지세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지만 노후보는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만약 서해교전이 없었다면 노후보가 노사모 회원들과 월드컵 3, 4위전을 응원하는 장면이 전국에 방송되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선거 전략가는 노후보가 아직도 자기를 경선 주자쯤으로 아는 모양이라고 꼬집었다. 대통령 후보로서의 처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노후보에게 ‘불안정하다’ ‘감이 아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후보의 한 측근은 아직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명했다. 대선기획단이 본격 가동되면 문제점이 단박에 해결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기획단 기획위원으로 임명된 대다수 의원들은 ‘신문에서 발령 났다는 기사만 보았을 뿐, 노후보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래저래 2002년 여름은 노후보에게 어느 때보다 무덥고 지루한 계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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