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신바람 다시 몰아치는가
  • 이숙이 기자 (soolyi@sisapress.com)
  • 승인 2002.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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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역풍'을 업고 노풍이 꿈틀거리고 있다. 개미군단의 후원금이 촉주하고 노사모 회원 수가 가파르게 늘어나는가 하면, 당 안팎의 개혁 세력도 뭉치기 시작했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까.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김민석 역풍’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김민석 전 의원이 정몽준 캠프로 말을 갈아탄 후 오히려 개미군단의 후원금이 답지하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 회원 수가 급증하는 등 제2의 노풍(盧風)이 불 조짐이다.




10월17일부터 폭주하기 시작한 민주당 온라인 후원금은 4일 만에 5억원을 훌쩍 넘겼다. 모금이 시작된 10월1일부터 16일까지 9백60만원이 모인 데 비하면 가히 폭발적이다. 또 선대위 국민참여운동본부가 소액 다수 후원을 겨냥해 추진하는 ‘희망 돼지 저금통’과 ‘희망 티켓’(후원금 약정서) 분양 사업에도 참여자가 급증해 19일 현재 희망 돼지 4만5천7백1개와 희망 티켓 4만6천8백65장이 분양되었다. 이미 분양된 것만 따져도 조만간 13억4천여만원이 들어온다는 얘기다. 선대위의 한 관계자는 외환 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던 것처럼, 노후보가 위기에 처하자 희망 돼지 모으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노사모 신규 회원도 크게 늘었다. 10월17일 2백40명, 18일 7백63명, 19일 8백20명, 일요일인 20일에도 4백10명이 새로 가입해 총 회원이 5만6천명에 이르렀다.


‘김민석 역풍’은 당 안팎의 개혁 세력이 뭉치는 데도 기여했다. 민주당 내 386 의원과 원외 지구당위원장들은 성명을 내고 “민주 정통성을 지닌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승리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다짐했다.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개혁적 국민정당’(약칭 개혁국민정당) 추진위원회도 10월20일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열고 노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한때 개혁국민정당이 노후보에게 지지를 조건으로 지분을 요구했다는 둥 독자 후보를 내려고 한다는 둥 뒷말이 많았으나, 정국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조건 없는 노무현 지지로 급선회한 것이다.


당 안팎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면서 선대위 관계자들의 표정도 모처럼 밝아졌다. 10월18일 선대위 회의에서는 허운나 인터넷 선거운동본부장이 민주당 홈페이지에 올라온 애절한 사연들을 읽는 동안 참석자 가운데 일부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10월19일 선대위 당직자들과 북한산 등반에 나선 노후보는 “외롭더라도 옳은 길이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어 지지자들의 성원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 날 북한산 입구는 마치 ‘노풍’이 몰아치던 경선 현장처럼 분위기가 뜨거웠다.


동교동계 최후의 선택이 변수


하지만 선대위 내부에서조차 이런 분위기가 얼마나 지속될지, ‘반짝 동정’을 지나 ‘지지도 반등’으로까지 이어질지 걱정하는 눈치다. 반노·비노 진영의 대규모 탈당이 실제로 벌어지고, 특히 민주당의 최대 주주인 동교동계까지 가세할 경우 노후보는 자칫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가에서는 이미 ‘김민석 탈당’으로 동교동계 이탈의 신호탄이 올랐다고 본다. 동교동계 사정에 밝은 김 전의원이 먼저 당을 나간 데는 이미 어떤 합의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정균환 총무 등 범동교동계 인사들이 노후보를 압박하며 사용하는 논리가 김 전의원의 그것과 똑같아서 주목된다. 김씨는 탈당 선언문에서 ‘냉전 회귀 세력의 집권을 막고 민주평화개혁 세력의 대선 승리를 위해 정몽준 신당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런데 정총무 역시 최고위원회의와 의원총회에서 잇달아 ‘냉전 회귀 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후보 단일화가 절실하다’면서 ‘냉전 회귀 세력’과 ‘민주평화개혁 세력’을 거론했다. 정총무와 김 전의원은 4·13 총선 때 함께 공천을 주도하고 이후 중도개혁포럼을 만드는 등 ‘한 묶음’으로 움직여왔다. 이 때문에 민주당 안에서는 최소한 정총무는 김 전의원의 탈당을 미리 알았을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이와 관련해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이인제 의원이 김 전의원이 탈당한 직후 국회 운영위원장실로 정총무를 찾아간 사실에 주목하라고 귀띔했다. “김 전의원이 정총무의 묵인 아래 움직였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이의원은 정총무가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동교동 직계 부대가 최근 ‘행동 통일’을 결의한 것도 심상치 않다. 한화갑·김옥두·최재승·설 훈 등 동교동 비서 출신 의원 10여 명은 10월16일 시내 한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11월 초까지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향후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을 논의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서 나오는 얘기가 한결같이 노후보에 대해 부정적이다. 한 동교동 출신 의원은 “노후보가 너무 한다. 그동안은 우리 처지가 어려워 나서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적극 나설 생각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때 노후보를 돕던 문희상·정동채·이강래 의원도 현재 노후보와 거리를 두고 있다.


동교동계가 이렇게 등을 돌린 데는 노후보의 ‘햇볕정책 폐기’ 발언과 신기남 최고위원의 ‘4천억원 계좌 추적’ ‘이근영 금감위원장 사퇴’ 요구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한화갑 대표는 얼마 전 노후보가 ‘햇볕정책 폐기’ 발언을 하자 “노후보는 공부 좀 하고 말하라”며 불쾌감을 드러냈고, 최근 신기남 최고위원이 이근영 금감위원장 자진 사퇴를 요구하자 “야당 주장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당의 입장에 따라야 한다”라고 문제 삼았다. 이를 두고 여권 핵심에서는 청와대가 더 이상 노후보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고, 이를 감지한 동교동계가 집단 행동에 들어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문제는 실제로 청와대, 즉 김심(金心)이 노후보를 팽(烹) 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물론 청와대는 펄쩍 뛴다. 박선숙 대변인은 10월18일 논평을 내고 “정치권에서 ‘청와대의 특정 후보 띄우기’ ‘단일 후보 옹립에 청와대 배후’를 말하고 있으나 터무니없다. 대통령과 청와대를 선거 정국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민주당 내부 갈등에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는 것이 정가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특히 노후보의 최측근인 신기남 최고위원은 “동교동계가 노후보 고사작전을 벌이고 있다” “김민석 전 의원의 탈당에는 배후가 있다”라며 음모론을 제기하더니, 김홍일 의원 당적 정리와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인책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노후보 진영의 한 인사는 이런 얘기가 나온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9월 하순께 박지원 비서실장과 가까운 청와대 한 수석이 기자들과 만나 ‘노·정 단일화가 안되면 창만 좋은 일 시킨다. 가능성은 정에게 있다’고 얘기했다. 이를 전해 들은 노후보측 김원기 고문이 박실장을 만나 호통을 쳤고, 박실장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노무현측 “김민석 역풍 열흘만 더 불면…”


노후보도 음모론에 가세했다. 그는 10월20일 개혁국민정당 창당준비위원회 발족식에 참석해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고 힘깨나 쓰던 사람들이 역할을 나눠 노무현 흔들기 작전을 쓰고 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연설 직후 노후보는 ‘힘깨나 쓰던 사람들’이 정균환 총무를 비롯한 중도개혁포럼을 겨냥한 것이라고 표적을 좁혔지만, 주변에서는 동교동계와 청와대까지 포함한 ‘선전 포고’라고 해석한다.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만약 동교동계가 집단 탈당할 경우 오히려 노후보의 짐을 덜어주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노후보가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못했던 DJ의 그림자가 자연스레 걷히면서 반대로 ‘DJ 에게 버림받은 노무현’이라는 동정 심리가 확산되리라는 것이다. 한 영남 지역 일간지 기자는 “부산에서는 노무현이가 더 망가져야 산다는 역설이 나온다”라고 지역 민심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선거 전문가들은 ‘동교동계 탈당=노무현 몰락’이라고 잘라 말한다. 1997년에는 11%까지 지지율이 떨어진 이회창 후보가 그나마 텃밭인 대구를 거점으로 삼아 극적인 반등에 성공했는데, 동교동계가 떨어져 나갈 경우 노후보는 호남이라는 ‘비빌 언덕’마저 잃게 된다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전국에서 한 곳도 여론조사 1등을 못 하면 절대 바람을 일으킬 수 없다. 노후보에게는 호남이 최후의 보루다”라고 말했다.
관건은 이제 노후보 지지율이다. 동교동계는 11월4일까지로 시한을 못박았다. 그 때까지 노후보가 지지율을 끌어올리지 못하면 다음 행동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11월5일 거사설’이니 ‘죽음의 화요일’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공을 넘겨받은 노후보 진영은 ‘김민석 역풍’이 앞으로 열흘만 더 지속되면 제2의 노풍이 가능하다고 기대한다. 지금은 기존 지지층이 뭉치는 단계이지만 조금만 더 힘이 붙으면 정몽준 후보나 부동층으로 빠져나간 표가 돌아오리라고 믿는 것이다. 한 참모는 “최근 노후보 지지율은 1~2% 상승한 반면, 정후보 지지율은 오히려 빠지는 분위기다. 정후보가 제2의 이인제가 될 수도 있다”라고 기대 섞인 관측을 내놓았다(42쪽 기사 참조).


김민석 전 의원의 탈당으로 촉발된 ‘노후보 살리기’가 단발적인 소액 주주 운동으로 끝날지, 아니면 거꾸로 등 돌린 대주주까지 다시 끌어들이면서 대규모 반등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열흘, 노후보 지지율 추세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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