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역전이냐 인생 기만이냐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1.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섯 개 숫자가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 65억원 당첨자가 나온 이후 판매소마다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이다. 로또 열풍이 거세지자 복권을 둘러싼 옹호론과 비판론의 대결도
"45개의 숫자가 온다.” 지난 가을, 이 한 줄의 카피를 내세운 광고가 각종 일간지며 지하철·옥외 전광판을 도배하다시피 뒤덮었을 때 일반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로부터 석 달. 일반인들이 이 숫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숫자 45개 중 6개를 알아맞혀 상금을 탄다는 ‘로또 645’. 복권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이 신종 복권이 12월 말 2주 연속으로 20억원 당첨자를 배출한 데 이어 지난 1월11일 급기야는 국내 복권 사상 최고액(65억7천만원) 당첨자를 내자 대한민국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 12월2일 로또 복권이 처음 출시될 때만 해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나라 바깥에서는 복권 시장의 노른자위를 거지반 잠식했다는 ‘복권 중의 복권’이라지만 국내에서 로또 인지도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65억 쇼크’ 이후 상황은 급반전했다. 로또 복권과 관련된 테마 주들은 65억원 당첨자가 배출된 바로 다음날부터 급등세를 형성하며 이른바 로또 주가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로또 판매 또한 급증했다. 1회차 37억원을 시발점으로, 5회차까지 40억∼50억 원 수준을 오르내리던 로또 주간 판매액은 65억원 당첨자를 배출한 6회차에 1백53억원, 7회차에 1백3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사회 분위기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회사원 안 아무개씨(33)는 “우리도 로또 사서 인생 역전 한번 해 봐?”라는 말이 요즘 유행어라며, 회사 동료건 동창들이건 만나면 로또 얘기로 꽃을 피운다고 말했다. 복권 판매소에서는 이런 분위기가 더 극명하게 감지되었다. 기존 즉석식 복권이나 추첨식 복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로또 단말기를 가리키며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다짜고짜 묻는 초심자가 부쩍 늘었다. 덕분에 로또 구입자는 1월 중순 현재 2백만명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미래사회전략연구소 추산).





고액 당첨자 낸 판매소 문전성시


이런 분위기에서 ‘대박’을 터뜨린 것이 1등 당첨자를 배출한 이른바 ‘복권 명당’들이다. 65억원 당첨자를 배출한 경기도 남양주시 킴스클럽 내 복권 판매소는 밀려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였다. 주인 원숙희씨(57)는 “1등을 배출한 곳의 지기(地氣)를 받겠다며 멀리 부산·광주에서도 복권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한 시간 남짓 지켜보는 동안에도 퀵 서비스 배달원, 포대기로 아기를 싸서 업은 주부 등 30여 명이 쉼없이 이곳을 들락거렸다. 개중에는 영험을 기원하려는 듯 스님을 대동한 60대 할머니도 눈에 띄었다.


흥미로운 것은, 복권 무관심층으로 분류되어 왔던 20∼30대 젊은층과 여성층까지 로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젊은 세대는 로또 복권을 신종 놀이인 양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복권 분석이 취미라는 대구의 김병철씨(24)에 따르면, ‘나만의 것’을 중시하는 신세대에게는 ‘나만의 번호’를 선택할 수 있는 로또의 특성부터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 사이에는 자신의 탄생 별자리로 행운의 숫자를 점치거나, 알파베트마다 매겨진 고유 숫자에 따라 자기 영문 이름에 해당하는 행운의 숫자를 추출하는 것이 유행이다. 자주 나온 당첨 번호를 분석하면 로또의 유형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확률 신봉파들은 또 당첨 번호를 순차적으로 조합하거나 ‘로또 계’를 조직해 복권을 공동 구매하는 놀이를 즐긴다. 반면 나이 든 사람들은 로또를 번거롭다고 생각한다. 20년 가까이 복권을 취급해 왔다는 서울 마포의 복권방 주인 김주식씨는 “나이 든 손님들은 로또를 사도 자기가 직접 번호를 선택하기보다는 기계로 자동 선택하는 쪽을 선호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로또 복권이 이렇게 복권 무관심층에까지 저변을 넓혀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전문가도 많다. 로또 복권 운영을 맡고 있는 국민은행측은 로또 복권을 ‘진화한 복권’이라고 표현한다. 즉석식 복권이 전통적인 추첨식 복권을 대체했듯, 이제는 온라인 방식의 로또 복권이 즉석식 복권을 대체할 차례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한 복권이란 뒤집어 말해 ‘진화한 중독 메커니즘을 함유한 복권’을 의미한다는 것이 한국마사회 이흥표 상담실장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도박은 금전적 강화(판돈)가 클수록, ‘통제력의 착각’을 불러일으킬수록 중독성이 커진다. 통제력의 착각이란 스스로 게임을 선택할 수 있고 게임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근본적으로 도박판에 예측 가능한 법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통제력의 착각에 빠진 도박꾼들은 기술과 전략을 개발하고 연구하면 게임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점점 더 중독의 늪에 빠져든다. 경마·블랙잭처럼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도박에 중독자가 더 많은 것은 그때문이다.


그런데 로또 복권은 이 두 가지 메커니즘을 모두 구현하고 있다. 일단 로또는 1주일에 한 번 추첨할 때까지 당첨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약점을 판돈을 키움으로써 극복했다. 판돈을 고정시키지 않고 그때그때 판매액에 따라 1등 당첨금을 정하게 한 것부터가 로또의 새로운 전략이었다. 이렇게 모아진 판돈을 로또는 1등에 몰아주게끔 했다(전체 당첨금의 50% 가량이 1등에 배당된다). 더욱이 1등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로또 당첨금은 5회차까지 이월되며, 그 때마다 당첨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있다.


숫자를 구매자가 직접 선택하게끔 한 것 또한 통제력 착각을 유발하는 장치라고 이실장은 지적했다. 숫자를 직접 선택한다 한들 로또 복권에서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백14만5천60분의 1에 불과하다. 주택 복권 당첨 확률(5백40만분의 1)보다 훨씬 낮다.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복권을 매주 20만원어치씩 3천2백년간 사야 한 번 당첨될까 말까 한 확률이다. 그런데도 로또는 ‘45개 숫자 중 6개만 맞히면 인생 역전’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흐려놓는다.







“진화한 상술” “서민에겐 희망” 양론 팽팽


물론 다른 도박에 비해 복권의 중독성이 훨씬 약하다는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 ‘복권 해서 패가망신했다는 말 들어 보았느냐’고 한 복권 애호가는 반문한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복권 구입에 쓰는 돈은 1년 평균 1만3천원 남짓. 카지노(3백33만원), 경마(4만5천원), 경륜(5만원)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갈수록 빈익빈 부익부를 절감하는 서민들에게는 복권이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없는 사람 돈을 뺏어 없는 사람을 돕겠다는 발상이 말이 되느냐’며 복권 제도의 이중성을 꼬집는 비판이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로또의 사행성 여부를 놓고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핫이슈 토론’이 벌어지자 글을 올린 한 이용자(ID:용감이)는 이렇게 비아냥댔다. “로또의 사행성을 비판하는 것은 복권 없이도 잘 나가는 사람들뿐이다. 나도 연봉이 3천만원만 되면 복권 안 산다.”


실제로 복권을 사는 주 계층은 돈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국민은행이 2001년 주택·또또 복권 1억원 이상 당첨자 43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중 67.9%는 월 소득 2백만원 이하인 중하층에 속했다. 이런 서민들에게는 복권 당첨이 사실상 거의 유일한 계층 상승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국민은행 복권사업팀 이인영 부장은 말한다. 복권 판매로 거둔 수익금의 40% 가량(세금 포함)은 국민주택조성기금·중소기업창업기금 등 정부 기금으로 쓰이는 만큼 복권은 서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기능도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는 정부측 논리와도 상통한다. 건설교통부·과학기술부·노동부·행정자치부·중소기업청·산림청·제주도 등 7개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지난해 ‘정부가 앞장서 한탕주의를 조장하느냐’는 비방에도 불구하고 로또 사업을 밀어붙였다. 발행 종수가 무려 23종에 달하는 복권 시장의 난립상을 바로잡고 전근대적인 복권 유통 구조를 개선해 세수를 증대하고 국민 복지를 증진시키겠다는 명분에서였다. 문제는, 이렇게 출발한 로또 복권이 과연 과거의 후진적인 관행을 제대로 극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겉보기에 로또 복권은 분명 선진적인 복권이다. 로또 복권을 사러 가면 판매소 입구마다 전광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광판에는 현재까지의 로또 복권 누적 판매액에 따른 1등 예상 당첨금이 표시된다(국민은행에 따르면 통상 전체 판매액의 23% 가량이 1등 당첨금으로 배당된다). 몇 장이 발행되고 팔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기존 복권에 비한다면 엄청난 진보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예상치일 따름이다. 전광판 숫자가 실시간으로 집계된 판매액을 반영한다고 믿으면 오산이다. 기자가 찾아간 판매소의 1등 예상 당첨금은 1월16일에도 1월17일에도 똑같이 25억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스템 운영을 맡은 온라인복권사업연합(KLS)에 따르면, 이는 하루치 판매액이 다음날 또는 다다음날 일괄 집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첨단 온라인망을 자랑한다는 로또 복권이 이같은 주먹구구식 집계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시스템 문제라기보다 정책 문제라는 것이 홍보 관계자의 말이다. 곧 시스템으로는 실시간 집계가 가능한데 ‘영업 기밀상’ 이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은행이 회차별 판매 내역을 밝히기를 거부하면서 내세운 이유 또한 영업 기밀이었다.





판매액 집계, 주먹구구


그러나 이는 로또를 도입해 복권 사업의 대국민 신뢰도를 높이겠다던 애초의 약속에 위배된다. 복권동호회 ‘복덩어리’ 운영자인 손영창씨는 “로또 복권은 온갖 이권개입설로 얼룩졌던 스포츠 토토 복권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돼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실시간 판매액뿐 아니라 복권으로 조성된 기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손씨의 주장이다(타이완은 로또 복권 추첨 방송 중 이같은 기금 사용 내역을 매주 상세히 밝히고 있다).


복권 사업자의 말마따나, 복권을 게임으로만 즐길 수 있으면 좋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은 여전히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복권을 산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65억원 당첨자를 배출한 복권 판매소를 찾은 남양주시의 한 주민은 “너무 가까운 데서 횡재한 사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마음이 어수선해 잠이 오질 않았다”라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김현수씨(사는기쁨 신경정신과 원장)는 로또 복권이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투기 심리까지 자극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권으로 ‘인생 역전’을 이루라는 사회,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인생 역전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역설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