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시신은 참혹했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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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인 9차 살인 사건 현장검증/가슴 난자당하고 음부 훼손돼
2년 6개월. 화성연쇄살인 9차 사건(김미정양 피살 사건) 범인을 기소할 수 있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살인 사건의 경우 공소 시효는 15년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그 사회적 파장에도 불구하고, 공소 시효가 개별 사건마다 따로 적용된다. 아직 공소 시효가 남은 사건은 7차·9차·10차다. 1988년 7월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는 7차 살인 사건의 경우 공소 시효가 두 달밖에 남지 않아 사실상 범인을 잡기는 틀렸다. 1991년 4월 일어난 10차 사건은 공소 시효가 3년 남아 있다.

1990년 11월15일 발생한 9차 사건은 화성연쇄살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사건이다. 피살자 나이가 겨우 열세 살로, 8차 살인 사건 희생자와 함께 가장 어리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침착했던 김상경을 광분하게 만들었던 비극의 피살자가 바로 김미정양이다. 살해 수법은 연쇄 살인의 총집합이라고 할 정도로 엽기적이었다. 경찰 수사의 허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기도 했다.

1990년 11월15일 안용중학교 1학년이던 김미정양은 청소 당번이었다(그 날 따라 김미정양을 늦게 하교시킨 담임은 훗날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김미정양은 친구 이 아무개양과 함께 사건 당일 오후 5시에 하교했다. 마지막 연쇄 살인이 있은 지 2년이 지났고, 8차 사건 범인도 검거된 터라 경찰이나 주민 모두 다소 경계심이 풀려 있을 때였다. 미정양이 송산리 안용중학교에서 능4리 집으로 가는 길은 4km에 달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주변은 야산이었다. 안개가 자욱해 한치 앞도 보기 힘들었던 하교길이었다. 병점리 원바리고개로 들어가기 전 친구 이양은 집으로 가기 위해 김양과 헤어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김미정양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이양네 집은 여인숙을 하고 있었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인숙은 남아 있다. 5월2일 기자가 이양을 찾아 여인숙을 방문했을 때 이양 어머니는 딸이 없다며 취재를 거절했다. “13년 전에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형사들이 다 우리집에 와서 잤어. 6개월 동안 우리집은 형사들 숙소였다구. 그때 나는 경찰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하고, 딸은 조사받느라고 시달리고…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뭘 물어보려고.”

사건이 난 1990년 11월15일 김양이 귀가하지 않자 가족은 경찰에 신고하고 밤새 마을을 수색했다. 다음날 아침 행방불명된 김미정양을 발견한 사람은 삼촌이었다. 김양은 태안읍 병점5리 삼성석재 뒤 야산에 교복과 볏가리로 덮인 채 죽어 있었다. 시신은 길가에서 1백5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팔다리가 스타킹으로 묶이고 몸은 구부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매듭에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입에는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스타킹과 블라우스로 목이 졸린 것이 사인이었다.

시체를 본 형사들은 치를 떨었다. 질 내에서 도시락의 포크 수저와 볼펜이 발견되었고, 음부 주위는 상처투성이였다. 머리에는 타박상이 남았다. 범인은 김양이 죽은 후에, 가슴에 칼자국을 19개나 냈다. 현장에서 발견된 면도칼에서는 핏자국이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은 강간을 했으나 질 내에 사정하지는 않았다. 블라우스와 교복 웃옷에서 정액이 검출되었는데, 이것이 범인이 남긴 유일한 증거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검사 결과 정액 주인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죽은 김양의 위장에는 사망 1시간 전에 음식물을 섭취한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 식당 주인들 가운데 그 날 김양을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김양이 실종된 원바리고개와 시체가 발견된 야산은 지금은 아파트 건설 공사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경찰청(당시 치안본부)은 1990년 11월28일 사건 발생 책임을 물어 남택선 화성경찰서장을 직위 해제하고, 후임에 윤한성 인천시경 수사과장을 임명했다. 파문이 큰 살인 사건이었던 만큼 이후 전개된 수사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오점을 남겼다. 1990년 12월18일 주민 차겸훈씨가 기차에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경찰 조사를 받은 후부터 차씨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화성경찰서 방종찬 강력계장은 “차겸훈씨는 사고로 죽었다. 언론이 자살로 부풀렸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죽음은 <살인의 추억>에서 사고사(영화 속 인물은 백광호)로 묘사된다. 1990년 경찰은 살인이 있기 며칠 전 다른 여학생을 추행한 혐의로 12월15일 체포한 윤 아무개군(당시 19세)을 김미정양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윤군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사건 당일 윤군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있고, 윤군 옷에 혈흔이 있는 등 증거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윤군이 기자들과 판사가 보는 앞에서 범행을 시인할 때만 해도 경찰은 득의양양했다.

그러나 윤군은 그해 12월22일 현장검증을 하다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해 경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후 목격자 증언이 조작되었고 수사 과정에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은 궁지에 몰렸다. 급기야 수사본부는 윤군이 범인이라고 확신한다며 일본에 정액 DNA 샘플을 보내 검증을 의뢰했다. 검증 결과는 영화 그대로다. 1991년 2월9일 일본과학수사연구소는 윤군의 정액과 김양 시체에서 발견된 정액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통보했다. 살인 누명을 벗은 윤군은 1997년 암으로 죽었다.

그 후에도 경찰은 원주교도소에 복역하던 정 아무개씨와 인근 목장에서 돼지를 사육하는 김 아무개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기도 했으나 번번이 증거를 찾는 데 실패했다. DNA 조사에서 9차 살인 사건 범인은 1991년 10차 사건 범인과는 다른 인물임이 밝혀졌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관계자들은 “말이 연쇄 살인이지 실제로는 범인이 여러 명 있을 것으로 본다. 기껏해야 2∼3건만 동일범의 소행이다”라고 말한다.

미정양이 살아 있다면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미정양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에서 가장 많이 운다고 한다. 현실에서 김미정양 살인 사건은 아직 공소 시효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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