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컨센서스는 신자유주의와 거리 멀다"
  • 김용기 ()
  • 승인 2000.10.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존 윌리엄슨 박사가 말하는 ‘왜곡의 실상’
워싱턴 컨센서스(합의).’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경제 교리쯤으로 이해되는 이 용어만큼 정치적이고, 이념적으로 도발적인 말은 찾기 힘들다. 이 용어는 ‘신자유주의(시장 지상주의) = 미국의 이해 = 세계화 = 워싱턴 소재 국제기구(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등)가 선호하는 정책’이라는 가정을 만들어냄으로써 현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운동 영역에 걸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위의 등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시사저널>은 1989년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개념을 처음 선보였던 미국 워싱턴 소재 두뇌 집단인 국제경제연구소(IIE)의 존 윌리엄슨 박사를 직접 만나 위의 등식을 정밀하게 재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워싱턴 컨센서스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한껏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장 지상주의는 별로 닮지 않았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민과 관을 구분하지 않고 걸핏하면 등장하는 시장의 신뢰 혹은 시장의 판단을 앞세운 시장 지상주의는 워싱턴 소재 국제기구인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World Bank) 이코노미스트들의 시각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어 낸 존 윌리엄슨(63)은 이 말이 현재 신자유주의와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크게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기자는 워싱턴 특별구 중심인 듀퐁서클 지하철역 바로 옆에 위치한 국제경제연구소에서 존 윌리엄슨을 만났다. 건네받은 이력서에서 그가 미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흥미로웠다. 그는 1981년 이 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워싱턴으로 건너온 이래 영국 국적을 유지해 왔다. 미국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미국의 이해를 옹호하고 영국 사람이라고 해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미국 사람으로 간주되기를 원한 적도 없고, 또 자신이 미국인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냥 태생적으로 분류된 영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인 미국 중앙 은행의 경제학자 모이세스 네임에 의하면, 사람들은 경제 사상을 단순화하는 도구로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우선 워싱턴 컨센서스는 냉전 종식 이후 승자를 위한 경제 이데올로기로 떠올리기에 적당한 상품이었다. 역으로 그들 승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본래 내용을 극단화한 후 이를 비판함으로써 본래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제안된 개혁의 내용마저 매도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정치적 이해에 기반을 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세계적 현상인 것 같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자들도 자기네 주장이 워싱턴 소재 국제기구들이 공인하는 국제적 규범(인터내셔널 스탠더드)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고 치장함으로써 정치·경제적인 이득을 보려고 한다. 또 이에 반대하는 세력 중 일부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세계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싸잡아 비난함으로써 단기적 이해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통해 특히 후자의 세력이 치르는 대가는 작지 않다. 그들은 세계화를 무조건 반대함으로써 세계화 반대라는 구호 자체를 어쩌면 공허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또 세계화의 특정한 측면을 거부하는 재벌의 논리에 동조하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외국인 직접 투자를 반대하는 일부 시민운동의 사례가 그 범주에 들 수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은 1989년 국제경제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의 발제 자료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존 윌리엄슨은 남미 사람들이 당시 남미를 비롯해 세계를 풍미한 자급자족적· 폐쇄적 경제 체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며, 스스로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외채 탕감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워싱턴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자료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워싱턴 경제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경제 개혁의 내용을 정리하고, 이 목록에 비추어 볼 때 남미의 각 나라들이 이만큼 진전했다고 규정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워싱턴 컨센서스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워싱턴의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 당국자들이 생각하기에 남미 국가들이 수행하기를 바라는 열 가지 정책 목록을 정리했다. △재정의 건전성 확보 △경제적 성과를 높이고 소득 재분배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공공 지출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 △조세 제도 개혁 △금리 자유화 △경쟁 환율 제도 도입 △무역 자유화 △외국인 직접 투자 자유화 △민영화 △시장 진입과 퇴출을 자유롭게 하는 탈규제 △사적 소유 보장제도 확보 등이 그 내용이었다. 때문에 이 제안은 1980년대 말이라는 시간과 남미 국가들의 정치 경제 발전 단계라는 구체적 공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윌리엄슨의 지적이다.
이상의 열 가지 요소를 살펴보면 본래의 워싱턴 컨센서스는 지금 시장지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국가의 최소화나 후퇴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경제 효율성만을 강조하고 소득 재분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편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완전한 자유변동 환율제로 전환하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가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부른 열 가지 항목을 정리하던 1989년은 이미 레이건 행정부 1기 중 창궐했던 시장근본주의가 이성적 경제 정책으로 대체되고 있던 때였다. 이미 레이건 시절의 경제 정책 중 무엇이 살아 남을 수 있고 무엇이 소멸될 것인지 전망이 분명해지던 시점이었다.

통화적 규율은 남지만 통화주의는 소멸하고, 조세 개혁은 계속되지만 조세감축론은 퇴조하고, 무역 및 외국인 직접 투자는 계속 주창되지만 완전한 자본 자유화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식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진입과 퇴출에 대한 자유는 보장되지만 금융기관에 대한 건전성 규제나 환경 보호를 위한 규제 강화가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던 시점이었다. 레이거노믹스가 수명을 다하던 때, 경제 정책 방향에 대한 최소 공통분모를 정리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죽어가는 레이거노믹스의 극단적 형태인 시장 근본주의로 인식된다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윌리엄슨은 반문한다.

레이거노믹스의 시장근본주의는 1980년대 초반 한 시기를 풍미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도 그 정책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나 세계은행의 컨센서스로 자리 잡은 적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앤 크루거가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던 레이건 행정부 때 세계은행은 레이거노믹스의 보루가 아니었고, 이후 1987년 이래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스탠리 피셔 (현 IMF 수석부총재)는 레이거노믹스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최근까지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레이거노믹스에 조금도 연민을 갖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완고한(Die-hard: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영화 제목) 자유주의 주창자’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일본 정치경제학자 다카토시 이토가 IMF를 평하며), ‘워싱턴 컨센서스는 시장 근본주의’(헤지펀드의 원조 조지 소로스의 최근 저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암호명의 새로운 제국주의’(경제학자 쉐히드 아람의 한 논문에서) ‘브라질 위기는 자유 방임 세계 경제의 창조라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경제학자 람키슨 라잔의 논문에서)는 등의 예에서 등장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는 본래의 의미와는 아주 다르게 쓰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폴 크루그먼도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해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한다. 윌리엄슨의 워싱턴 컨센서스는 경제 정책의 열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부와 시장에 대한 믿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간략히 정리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 정책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미덕(자유 시장과 건전한 재정)이 경제 발전의 핵심이라는 믿음이다.

왜 워싱턴 컨센서스의 본래 의미가 이렇게 변질했는가? 윌리엄슨의 친구인 미국 중앙 은행의 모아세스 네임이 올 봄 <외교정책(Foreign Policy)>이라는 학술지에 ‘워싱턴 컨센서스 혹은 워싱턴 혼란?’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이에 따르면, 우선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말이 등장한 때가 1980년대 말 소비에트 시스템이 붕괴한 시기와 일치했던 데서 혼란은 출발했다.

소비에트 블록 이외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도 받아들여졌던 사회주의 사상과 중앙통제주의라는 마법이 붕괴한 것은 각 나라로 하여금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 삶을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해 긴급한 대안을 찾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부적당하지만 일시적인 대체물로 사용되게 되었다. 하지만 각국에서 실제 실현된 정책들은 본래 워싱턴 컨센서스 모델의 불충분한 형태들이었고,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경쟁 정책이 받쳐주지 않은 거대 국영기업의 민영화나 시장 제도가 불충분한 상태에서의 자유화는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의 국외 유출이라는 최악의 상황만을 야기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윌리엄슨은 말한다. “쓰는 사람이 시시각각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결정하는 대로 그 의미가 해석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개념을 공격하는 게임을 더 이상 하지 말자.’ 대신 비판할 대상을 분명히 열거하고 그에 근거해 관련 정책을 토론하자.” 민과 관에 골고루 박혀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세계화의 모든 측면을 반대하는 집단 모두가 한번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