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의 ‘못다 한 이야기’ ④/뉴송도호텔 습격 사건
  • 정희상 전문기자·주진우 기자 ()
  • 승인 2004.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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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건달을 배신하다
1986년 6월 중순 한강 둔치에서 열린 제1회 전국 새마을(건달) 축구대회 뒤를 봐준 박남용 부장검사로부터 서울고검 부장검사실로 들어오라는 호출이 왔다. 그 무렵 박검사의 고검 사무실은 내가 구치소에 수감된 지인들을 종종 접견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나와 박검사가 여러 일을 상의하는 회의 장소이기도 했다.

부장검사실로 들어가자 여느 때와 달리 박검사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오늘처럼 수모를 당해본 적이 없다면서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을 없애야겠다는 것이었다. 박검사는 대검 감찰과에 불려가 새카만 후배 검사에게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내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간 서울고검 박남용 부장검사와의 ‘악연’은 그로부터 9개월여 전 대전교도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85년 9월 어느 날,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나는 재소자 추계 체육대회 예선을 앞두고 교도소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교도관이 불러 특별접견실에 가보니 서울고검에서 내려온 박남용 부장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하고 불편해 하는 나에게 그는 특유의 말솜씨와 친화력으로 대했다. 마치 십년지기와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 접견을 온 목적이 궁금했지만 차마 직접 물어볼 수가 없었다. 박검사는 신 아무개 의원의 자서전을 가지고 와 자수성가한 신의원을 본받으라고 말했다.
그 날 밤 나는 왜 박부장검사가 생면부지인 나를 찾아왔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푸느라 잠을 설쳤다. 나는 박부장검사가 고향 후배를 선도하고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특별히 찾아온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후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박부장검사에게 감사 편지를 수시로 써보내곤 했다. 나를 알아주신 박남용 부장검사를 위해서라면 한몸 다 바쳐 충성 보은하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986년 1월17일 나는 징역 5년 6개월 형을 마치고 만기 출소했다. 그때 내 나이 36세였다.

나는 석방 후 재기를 위해 서화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동안 내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과 유명 화가들에게서 구입한 그림을 판매해 사업 자금을 만들고자 했다. 나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그 해 2월16일부터 10일간 서화전을 열었다. 건달계 선후배들과 사업가·정치인 들이 너나없이 그림 몇 점씩 사주어 준비한 2백점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나는 그림 전시회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조경 사업체인 홍진개발(주)에 이 돈을 투자하고, 서울 서초동에 동거녀 유○경씨와 함께 살 셋집을 마련했다. 박남용 부장검사와는 거의 매일 만나 술좌석이나 사우나 등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나는 박검사로부터 다른 검사들을 여럿 소개받았다. 나는 대전교도소로 특별 접견을 와주신 박부장검사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평소 친분이 깊은 유명 가수들을 불러 여흥을 베푸는 등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남용 부장검사로부터 인천 뉴송도호텔 황익수 사장 얘기를 들었다. 박검사는 자기와 황사장은 죽마고우였지만 다른 길을 갔다고 말문을 열었다. 황사장은 이정재 사단 출신으로 자유당 시절 한때 건달 생활을 했다가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사업 실패 후에는 도시관광 소유이던 인천 뉴송도호텔을 운영했다. 박검사는 몇년 전 이 호텔에 5천만원을 빌려줬는데 이를 돌려받지 못하자 초등학교 동창인 황익수씨에게 경영권을 인수하도록 하여 부채를 변제받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황사장은 2백만원만 돌려줬을 뿐 나머지 4천8백만원은 돌려줄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황사장은 박검사를 피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찾아가도 피해버린다며 이 고통스런 세월이 3년이 다 되어간다고 나에게 하소연했다. 나는 박검사의 말을 들으면서 분노에 치를 떨었다. 대전교도소까지 내려와 특별 접견을 해준 박검사의 은혜를 갚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박검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인천 뉴송도호텔로 보낼 특공대를 선출했다. 맘보파 두목 오재홍에게 믿을 만한 후배 10명을 추려서 뉴송도호텔 황사장을 붙잡아 데리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맘보파 행동대원들이 뉴송도호텔에 황익수 사장과 함께 있다는 보고를 해오자 나는 미리 동행하자고 부탁해둔 서울 나이트클럽 운영자들과 함께 인천으로 내려가 황사장을 만났다. 호텔을 인수하러 온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인수 의사를 밝히자 권리금 2억~3억 원만 주면 경영권을 넘기겠다고 했다.

황사장 입에서 권리금 3억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박남용 부장검사가 호텔 인수시 5천만원을 빌려준 것으로 아는데 내가 호텔을 인수하면 그 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순간 황익수 사장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손가락을 떨었다. 내가 찾아온 목적이 박남용 검사의 채권 청부라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나는 황사장에게 박검사와 직접 만나 채무 관계를 먼저 해결하라고 권했다.

그 날 저녁 우리 일행은 황사장과 함께 서울 팔레스호텔로 가서 박검사와 자리를 함께 했다. 박검사는 내가 문제를 해결해주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곁에서 들으니 황사장은 박검사에게 원금 4천8백만원에 2년치 이자를 포함한 7천만원의 약속어음을 주며 별도로 만기 1986년 6월30일자 8천만원짜리 차용증을 써준다고 했다. 이 날 이후 나는 박남용 검사가 특별 접견해주신 은혜를 200%는 갚았다고 자부하며 잔디조경업체 홍진개발(주) 업무에 전념했다.

박검사에게서 신촌 힐사이드호텔에서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박검사는 애로 사항을 말하며 나에게 동업을 해달라고 설득했다. 나는 처음에는 홍진개발 잔디 조경 사업에 전념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박검사는 자기의 채권 해결을 위한 일이니 도와달라고 통사정했다. 이왕 고생했으니 호텔 경영권의 제1 주주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박검사를 만나자 무조건 황익수를 직접 처치하라고 지시했다. 박검사는 법률 용어를 써가며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출소 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서화전시회 및 건달체육대회를 폭력범죄단체 조직 재건을 위한 범죄 행위로 간주해 구속 수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것을 엮으면 교도소에서 5년은 썩게 만들 수 있다고 위협했다. 황익수를 처치해 완전 범죄로 만들든가 아니면 범죄단체결성죄로 징역을 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였다. 형법 조항을 보면 살인죄는 징역 5년 이상부터 사형까지이지만 범죄단체조직죄의 두목은 최하 10년 이상 최고 사형까지이다. 황익수 살해가 형량으로는 더 유리했다. 진퇴양난에 처한 나는 하루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했다.

이튿날 나는 박검사를 만나 청부 살인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대신 조건을 내걸겠다고 하자 박검사도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 녹음기를 숨긴 채 일곱 가지 요구 사항을 하나씩 제시하고 확답을 얻었다. 첫 번째 요구 사항은, 황익수를 처치한 뒤 어떤 위급 사항이 발생해도 절대 사표를 쓰지 말고 현직 검사로 남아 있어 달라고 했다. 박검사는 그 점은 염려 말라고 확실히 약속했다.

두 번째, 황익수가 살해된 후에는 행동대원 2명을 자수시키겠다. 그러면 후배들 개인 감정으로 저지른 단순 살인이 되어 사건이 더 확대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박검사는 대찬성이라며 틀림없이 조건대로 2명을 자수시키자고 했다. 세 번째 요구 조건은, 자수하는 후배 2명에게 최근 검찰에서 퇴임한 변호사 2명을 선임해 달라는 것이었다. 박검사는 당연한 것 아니냐며 적극 수용했다. 네 번째, 자수한 부하 조직원 2명에게 3년 정도의 징역형만 나오게 힘써 달라고 했다. 박검사는 이 대목에서 한참 망설이더니 우발적인 살인 사건일 경우 상해치사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만일 상황이 악화해 살인으로 기소된다 해도 합의금을 주고 합의서를 받으면 징역 2년6개월도 가능하다고 했다.

다섯 번째, 자수한 후배들에게 매월 생활비와 옥수발비로 얼마씩 도와주겠느냐고 물었다. 박검사는 2명 앞으로 한 달에 5백만원을 지급하되 가능하면 가석방으로 출소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여섯 번째 요구 사항은, 만일 행동대원 두 사람이 자수하더라도 돌발 사태가 발생해 내 이름 석자가 거론되고 주범으로 검거되면 어떻게 보상하겠느냐고 물었다. 박검사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만일 내가 구속되면 징역은 징역대로 받고 전과자와 상습범에게 주는 보호감호 10년이 병과된다고 했다. 그러자 박검사는 “너한테까지 수사가 확대되지 않을 것이지만 설령 확대되더라도 감호를 안받게 해주겠으며, 부득이한 일로 그마저도 안되면 내 집을 팔아서라도 석방되는 그 날까지 매달 가족 생활비를 대겠다”라고 약속했다. 나는 박검사가 이 모든 약속만 지켜주면 내가 구속되더라도 청부살인교사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으니 그 점은 안심하시라고 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조건을 제시했다. 앞의 여섯 가지 조건을 지킨다는 증표로 혈서를 써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현직 부장검사로서 이것마저 들어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계산했다. 혈서만은 안되겠다고 하면 나도 황익수 살해 청부를 없는 일로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박검사는 혈서를 당장 쓰자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모든 대화 내용은 내 양복 상의에 담아둔 고성능 녹음기가 기록했지만 성공적인지 확인해봐야 했다.

만일 녹음에 실패했으면 다음날 다시 녹음할 계획이었으므로 혈서는 내일 다시 만나 쓰자며 내가 제지했다. 혈서도 쓰고 소독과 치료도 해야 하므로 서초동 온천장 안마시술소에서 연필 깎는 예리한 칼을 준비해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집으로 가자마자 녹음기를 돌려 확인해보니 2시간짜리 대화는 완벽히 녹음되어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찍어둔 특공대 후배들을 비상 소집했다. 의리 있고 가장 믿음직한 이양○가 행동대원 10여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나는 특공대에게 박검사가 황익수를 살해하라고 요구했지만 절대 살해해서는 안되고 다리만 부러뜨리라고 했다. 기술 부족으로 미수에 그쳤다고 박검사에게 보고할 작정이니 낫을 가져가되 절대 목은 치지 말고 약간 긁힌 상처만 내서 황익수 본인 입에서는 낫으로 목을 쳐 살해하려 했다는 진술이 나오도록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7월22일, 신촌 힐사이드호텔에서였다.

이튿날 박남용 부장검사와 혈서를 쓰기 위해 서초동 온천장 안마시술소 특실방을 얻었다. 나는 혈서를 쓰는 과정에서 나눈 대화도 따로 녹음했다. 미리 준비한 A4 용지 한 장에 박남용 검사와 나는 새끼손가락을 면도칼로 그은 뒤 ‘信義’라는 글자를 썼다. 피가 마른 뒤 반반씩 나눠 곱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나중에 둘 중 누가 부인할 경우 국과수에 혈흔감정을 의뢰하면 되므로 이제 두 사람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황익수 습격 거사일은 7월25일 밤으로 잡았다. 이양○는 특공대 5명을 합숙시키며 대비하고 있었다. 나는 거사일 저녁 7시부터 박남용 검사와 알리바이 성립 장소로 약속해둔 역삼동의 대가룸살롱으로 가서 친구 손하성과 함께 박검사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퇴근 후 함께 지내던 박검사는 밤 11시쯤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들어가겠다고 했다. 거사 성공 여부는 신촌 자기 집으로 찾아와 보고하라며 암호를 정해주었다. 성공했으면 대문 인터폰을 누르고 “동해안에 해가 떴다”, 실패했으면 “서해안에 해가 진다”라고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그를 들여보냈다. 손하성과 함께 알리바이를 만들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부천에 있는 애리조나 스탠드바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신뢰가 깊은 그곳 문○남 사장을 찾아가서 그 날 밤 거사 사실을 털어놓고 알리바이 협조를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7월26일 오전 2시30분, 드디어 황익수 사장을 처치할 특공대 5명이 서울 노량진의 합숙소를 나와 경인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들이 탄 차는 새벽 4시께 인천 뉴송도호텔 앞에 멈춰섰다. 새벽 5시께 애리조나 스탠드바로 윤○한의 전화가 걸려 왔다. 황익수가 양다리가 으스러지고 손과 목에 상처가 났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박남용 부장검사 집으로 향했다. 손하성과 문○남이 대동했다. 박검사 집 앞에 도착하자 나는 문○남에게 훗날 무슨 일이 생기면 알리바이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수표 몇장을 쥐어준 뒤 헤어졌다.

손하성과 나는 박남용 검사 집 인터폰을 눌렀다. “동해안에 해가 떴다.” “동해안에 해가 떴다.” 암호를 대자 박남용 검사가 바로 나왔다. 얼굴이 환했다. 얼마 만에 본 밝은 모습이던가. 박검사는 나와 손하성의 손을 이끌며 축하 파티를 해준다고 근처 해장국집으로 갔다. 소주잔을 부딪치며 박남용 검사는 ‘브라보’를 외쳤다. 그는 수고했다면서 빠른 시일 내에 행동대원 2명을 자수시키자고 했다.
그런데 이후 문제가 엉뚱하게 꼬였다. 피습 직후 길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은 황익수 사장이 인천경찰서 형사들에게 박남용 부장검사가 투서를 제출한 데 대한 감정으로 김태촌을 사주해 윤○한을 비롯한 김태촌 똘마니들이 자기를 난자했다고 진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건 당일 오전 11시께 호텔에 있던 윤○한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내막을 다 알고 있는 윤○한이 고문을 받거나 노련한 경찰의 유도 신문에 넘어가 시인할 경우 박검사와 내가 드러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박검사를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상의했다. 나는 박검사만 믿고 있었는데 그는 발을 슬쩍 빼고 있었다. 내가 힘을 쓸 수밖에 없어서 평소 알아둔 5공 실세 한 사람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윤○한은 연행된 지 18시간 만인 다음날 새벽 3시에 경찰에서 풀려났다.

박남용 부장검사에게 섭섭했지만 현직 검사이므로 경찰에 바로 전화하면 교사범으로 의심받을 수 있기에 회피한 것으로 이해했다. 박검사는 윤정○이 무혐의로 풀려 나왔으니 이제 완전 범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박검사를 재촉했다. 단독 범행도 아니고 10여 명이 알고 있는 사건인데 어떻게 영원토록 완전 범죄가 될 수 있겠느냐며 더 큰 화를 부르기 전에 행동대원 나○로와 김○욱을 자수시켜 사건을 마무리짓자고 독촉했다.

황익수는 그때까지 인천경찰서에서 인지 사건 피해자로 진술조서를 받는 상황이었다. 황익수가 정식으로 고소장을 제출한 것은 사건 후 열흘이 지난 8월6일이었다. 8월7일 오전 11시30분께 손하성·윤○한·임○호·노○구와 함께 나는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잘 아는 인천경찰서의 한 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2시가 되자 인천경찰서 형사들이 가든호텔을 포위한 채 커피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간부 한 사람이 김태촌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경찰이 권총을 빼들었다.

그 순간 커피숍 입구에 한 중년 신사가 들어서고 있었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다름아닌 박남용 부장검사였다. 나는 보란 듯이 박검사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유유히 호텔 사우나로 들어갔다. 사우나탕에 있으면서도 안심이 안 되었다. 박검사와 나는 방을 빌렸다. 창문을 통해 가든호텔 앞을 보니 인천경찰서 형사들이 윤○한과 손하성을 연행하고 있었다. 임○호와 노○구도 잡혀갔다. 하지만 이들은 곧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박검사와 나는 이렇게 황익수 사장 피습 사건이 미제로 묻히는 줄 알았다. 황익수 피습 사건이 난 지 3주일쯤 지난 그 해 8월15일, 나는 평소처럼 태연히 지내다가 사업을 하는 한 선배의 광복절 가석방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막 출소한 선배와 손하성, 맘보 오재홍 등 선후배들이 대가룸살롱에 모여앉아 양주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 날 밤 오재홍은 분주했다. 목포 부하 조직원 한 명이 같은 날 수원교도소에서 가석방으로 출소했기 때문이다. 오재홍은 바로 근처 서진룸살롱에서 조직원들과 모여 잔을 돌리며 우리 술자리로 왔다갔다했다. 그 때 서진룸살롱에는 장진석·고금석·김동술 등 10여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재홍이 서진룸살롱을 나오자마자 안에서 칼부림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내 지시에 따라 인천 뉴송도호텔로 황익수를 감금하러 갔던 맘보 오재홍의 동생들과 장진석 일파가 서진룸살롱 복도에서 시비가 붙어 오재홍 동생 4명이 현장에서 살해된 것이다. 이것이 이튿날 세상을 발칵 뒤집은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배후로 맘보 오재홍과 내 이름이 언론에 슬슬 흘러나왔다. 황익수는 이때다 싶어 기자들을 불러모아 뉴송도호텔 사건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어버렸다. 서진룸살롱 사건에 이어 뉴송도호텔 황사장 피습 사건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만약 8월15일 서진룸살롱 살인 사건이 발생하지만 않았더라면 황익수 사장 피습 사건은 나와 박남용 부장검사의 힘으로 완전 범죄가 되어 수사가 종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현상 수배가 떨어졌다. 나는 도피하기로 하고 밤늦게 박검사를 남부순환도로에서 만나 현금과 수표 등 도피자금 5백만원을 받았다. 부산으로 내려간 나는 이○환 선배의 도움으로 다시 제주도로 건너가 숨어 지내면서 동거녀 유○경도 불러 같이 보냈다. 그러던 중 언론에서 박남용 부장검사가 검사 직을 사직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나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배신감을 느꼈다. 제주에서 공중 전화를 통해 서울에서 전에 두 사람이 자주 만났던 기원으로 박검사를 나오라고 해서 비밀스럽게 통화했다. 나는 박검사에게 혈서의 첫 번째 약속 사항인 사표 안 쓴다는 점을 위반할 수 있느냐고 강력히 항의했다. 그는 언론에서 잘못 보도했다고 둘러댔다. 박검사는 안심하라고 하면서 고생되더라도 조금만 더 피해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일은 더 확대되고 있었다. 일간 신문들이 김태촌파 검거에 현상금이 걸렸고 검거자를 1계급 특진시킨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부두목 이름을 달고 손하성 사진이 신문에 나온 것이었다. 손하성에게 연락했더니 자수하려고 변호사를 알아보고 다닌다고 했다. 그를 막아야 했다. 그동안 박남용 검사와 내 관계를 속속들이 목격한 손하성보다 내가 먼저 자수해야만 박검사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9월 초순 나는 목포로 나가서 경찰에 자수했다. 자수 후 모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혈서에 쓴 신의를 지키느라 박부장검사의 살인 교사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지금은 그때 결단을 후회하고 있다. 박검사는 나를 배신했고 얼마 후 그 충격으로 동거녀는 유산했다. 나는 폐암 환자가 되어 수술을 받은 후 16년 동안 감옥에서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동안 박검사는 내 형제들에게 몇천만원을 건네면서 용서해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나는 오랜 세월 망설이다가 이제야 세상에 사건의 진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감호재심 재판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감호재심 전체 참작 사유에서 범행 동기 부분은 5%도 안된다고 한다. 자칫하면 진실이 공개되어 나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 건달 세계에서도 매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진실을 밝힘으로써 나도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거듭나야 하고, 검찰도 진정한 검찰로 거듭나야 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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