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박제가 되어버린 ‘떡메 치기’
  • 宋 俊 기자 ()
  • 승인 1999.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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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설 풍속, 민속촌에서 명맥 유지
‘사라지는 것은 날개가 있다.’ 여운의 날개다. 반추의 날개다. 불귀(不歸)의 만물이 남긴 최후의 날갯짓은 강렬한 인상으로 추억의 휘장에 걸린다.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 비로소 사람은 떠나는 것의 뒷모습을 반추한다.

한 점의 박제로 박물관에 모신다고 멸종 위기의 동식물이 사라지지 않으랴. 지천으로 널린 것들도 덧없이 사라질 무렵 귀한 것이 된다. ‘불귀의 역설’이다. 구경꾼에 에워싸여 떡을 치는 저 진풍경도 한때는 흔하디 흔한 일상사였다. 지금은 민속촌의 ‘움직이는 박제’나 다름없다.

허탈한 것은 불귀의 만물을 북망산으로 내모는 논리의 맹목이다. 가벼움이다. 저들을 망각의 협곡에 장사 지낸 연원이 단지 경제의 논리, 효율의 잣대가 아닐까. 자본주의가 휘두르는 경쟁력의 칼날에 우리는 무심코 귀한 것들을 너무 쉽게 내준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것을 버리던 시절의 황량함도 지적받아야 한다. 박정희 쿠데타와 새마을운동이 재평가되고는 있지만, 그 시절 독재의 서슬에 사라져 버린 것들과 그 맹목의 가속력에 치여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것들은 여전히 관심 밖에 버려져 있다. 오히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형국이다.

세계는 지금 20세기를 조종해 온 효율과 경쟁 논리의 맹목을 반성하는 데 열심이다. 개발 지상주의를 꾸짖는 환경운동의 거센 목청이 그렇고, 다양함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열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그렇다. 과거의 유물에서 새 문화의 자양을 취하려는 ‘앤티크 열풍’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재학습이 한창인 것이다.

소를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온고지신의 안목에 따라 개혁의 질이 결정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챙길 것인가. 설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명절이다. 떡국 그릇 수만큼 늘어가는 ‘나이 값’에, 과거에 대한 성찰과 앞날에 대한 각오가 교차되는 근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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