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들의 고성 산불 피해 현장 ‘생태 탐사’
  • 강원도 고성/글·사진 李文宰 편집위원 ()
  • 승인 2000.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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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 피해 현장 생태 기행…‘생명의 힘’ 확인
가파른 비탈은 미끄러웠다. 빽빽한 소나무들은 서 있는 숯이었다. 죽은 나무들의 숲. 하지만 죽은 나무 아래 지표면은 치열한 ‘봄날’이었다. 검은 흙 사이로 고사리며 상수리, 아카시 나무들이 새 잎을 내밀고 있었다.

젊은 문인들은 지뢰밭을 통과하듯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시인 이산하씨는 “지팡이를 두드리며 천천히 걷는 인도의 수행자가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레를 밟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생명을 지극히 섬기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학야리 운봉산. 해발 200m가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중턱에만 올라서도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였다. 산불 감시 초소가 세워져 있었다. 동해는 물론이고 바다로 흘러내리는 능선이며 들판과 마을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1996년에 이어 지난 봄에 다시 ‘단군 이래’ 최대의 산불이 휩쓸고 간 곳이었다. 산불 피해 지역은 인간 중심주의를 반성케 하는 반성의 공간이었다. 생명과 재산을 잃은 인간에게 산불은 재앙이고, 그 흔적은 폐허였지만, 뭇생명에게는 신생의 터전이었다. 엄연한 자연이었다. 지난 6월8일부터 10일까지, 소설가 김주영·이경자 씨를 비롯해 최인석 이승우 하응백 이산하 정길연 장석남 조경란 김연수 김수이 천운영 김별아 김종은 등 젊은 문인 20명이 환경부가 주관한 ‘신인·중견 자연 생태 기행’에 참가했다. 환경부는 지난해부터 문인들을 초청해, 변산반도·낙동강 수계 등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는데, 이번이 그 네 번째였다.

안내를 맡은 환경부 정유순 사무관에 따르면, 산불 피해 지역 복구 대책은 의외로 단순했다. 인공 조림이 아니라 ‘자연 방치’가 최선의 대책이었다. 인간의 간섭이 적을수록 생태계 회복이 빠르고 완전하다는 것이다. 불에 타 죽은 나무들까지 그대로 두어야 한다. 죽은 나무들이 곤충류와 조류의 서식지와 은신처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토사 유출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인공 조림에 견주어 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다.

통일전망대에서 시작해 죽왕면 구성리, 토성면 학야리와 운봉리 등 고성군 산불 피해 지역을 돌아보고, 국립공원 설악산 용소계곡과 구룡령 생태 통로(아래 상자 기사 참조)를 관찰한 문인들은 자연의 복원력 앞에서 숙연했다. 생성과 소멸은 단절되어 있지 않았다. 소멸과 생성은 자연의 순환 구조 안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흙과 숲이 아니라 시멘트와 빌딩 사이에 살며, 직접 몸으로 부딪치기보다는 간접 경험이 많은 젊은 문인들에게 산불 피해 지역 답사는 곧 태어날 새로운 작품을 위한 ‘불씨’가 될 것이었다.

소설가 최인석씨(민족문학작가회의 소설분과위원장)는 “생태 기행이, 젊은 작가들이 환경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직 한국 문학의 바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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