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품에 안긴 '뜨거운 심재륜'
  • 정희상 기자 (hschung@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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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확정 판결 후 첫 출근…
현정권과의 '애증 관계' 새 국면 맞아


대법원에서 복직 확정 판결을 받은 심재륜 전 대전 고검장이 8월27일 첫 출근을 하자 검찰 조직은 적지 않게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관례에 따르자면 무보직 고검장으로 복귀한 그의 사무실은 대검찰청 청사에 두어야 하지만 검찰 수뇌부는 심고검장의 방을 서울 고등검찰청 13층 접견실에 마련토록 해 은연중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대부분의 일선 검사들은 그가 다시 검찰 조직으로 돌아온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서울 지검의 한 검사는 심씨가 복직 판결을 받은 데 대해 "검사는 물론 변호사나 판사 중에도 이번 복직 판결을 법리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번 판결을 놓고 검찰 일각에서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법무부와 검찰 수뇌부의 인사를 전례 없이 법원이 개입해 뒤엎었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쪽도 장기적으로는 이번 판결이 검찰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데는 인식을 같이한다. 심고검장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는 정부나 검찰 수뇌부가 함부로 인사를 하고 사퇴 압력을 넣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기대 때문이다.


파문 당사자인 심재륜 고검장은 복직 확정 판결 직후 기자와 만나 "기쁘기도 하지만 서글픈 심정도 든다"라고 말했다. 복직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던 지난 봄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그는 "만약 대법원이 나에게 복직 허용 판결을 내린다면 정부는 나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확정 판결 직후 그 말이 유효하냐고 묻자 그는 "검찰 조직으로 다시 들어가는 마당에 말을 아끼고자 한다"라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이어서 그는 "이번 판결로 명예만 회복했지 지난 2년 7개월을 고스란히 잃어버렸다는 데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복직 판결이 났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고, 잃어버린 세월을 위로해준 사람도 없다. 서글픈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무보직 고검장으로 검찰에 복귀함으로써 검찰 수뇌부는 뜨거운 감자를 품에 안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그가 복귀하는 바람에 기수를 중시하는 검찰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최경원 법무부장관(사시 8회)은 물론 신승남 검찰총장(사시 9회)도 사시 7회 출신인 심고검장의 후배이다. 이 때문에 검찰 수뇌부는 은근히 그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심고검장은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 서운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 초기에 스스로 그만둘 것 같지는 않다.


심재륜 고검장이 당장 검찰을 떠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정치 검사 퇴진을 요구한 그의 항명 파동을 지지하며 연판장을 돌렸던 후배 검사들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그의 구호에 적극 호응했던 일선 검사들, 특히 과거에 심고검장이 특수부와 강력부에 재직할 때 함께 일했던 비정치적인 검사들 중에는 그동안 몇 차례 있었던 인사에서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때문에 심고검장에게는 자기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후배 검사들의 명예까지 회복시켜야 할 짐이 있다.


겉으로는 심재륜 고검장이 마치 처음부터 현정부와 날카롭게 대립한 인물처럼 비친다. 1999년 초 검찰 항명 파동과 면직, 이후 정부를 상대로 한 복직 소송 등 일련의 과정만 놓고 보면, 철저하게 정권의 눈 밖에 난 검사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와 현정권의 핵심 세력 사이에는 '증오'못지 않게 '애정'도 깊다.


여야 구애 손짓 모두 거절




심고검장과 현정권의 핵심이라 할 동교동계와의 인연은 김영삼 정권 시절로 거슬러올라간다. 1996년 심고검장이 광주지검 검사장으로 재직할 때 함께 근무했던 한 현직 검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정부는 임기 말 검찰 체제를 정비하면서 심검사장을 대검 중수부장으로 내정했다가 막판에 PK 출신 안강민 중수부장으로 교체했다. 대신 그를 야당 총수이던 DJ의 정치 고향 광주로 보내 모종의 역할을 맡아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광주·목포 등지에서 동교동계와 친분이 있는 거물급들을 집중 단속해 비리 혐의로 엮어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주문을 무시하고 동교동계 인사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다."


이런 태도 때문에 그는 김영삼 정권 말기에 미운털이 박혔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초에 터진 한보사태가 그를 살렸다. 당시 두 차례에 걸친 검찰 수사로도 국민적 의혹의 불길을 끄지 못한 YS 정권은 여론에 떠밀리다시피 해 심재륜 광주지검장을 대검 중수부장으로 기용했다. 한보사건 재수사를 맡은 심중수부장은 김현철씨 구속만은 막아보려는 정권 핵심의 온갖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김씨를 전격 구속했다. 살아 있는 권력의 오른팔을 치는 수사를 지휘해 그는 일약 '국민의 중수부장'이라는 박수 갈채를 받았지만, 수사가 끝나자 한직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정권 교체 후 심재륜 검사가 DJ 정권과 갈등을 빚으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면직된 후 외로이 복직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심고검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98년 정권이 교체된 뒤 청와대에서 열린 첫 전국검사장회의에 나는 대구 고검장으로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자 중 나에게 유난히 관심을 기울이며 대구 지역의 민심 동향을 물었다. 나는 준비해 간 안정 대책 내용을 상세히 보고했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태정 검찰총장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나를 의도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정치 검찰의 공작이 시작되었다." 그가 말하는 공작이란 당시 김태정 총장 체제의 검찰 수뇌부가 대전 이종기 변호사 사건을 수사하며 폭로한 이른바 전별금 사건이다. 1999년 2월 심재륜 고검장이 일으킨 항명 파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항명 파동으로 검찰복을 벗은 그에게 지난 2년여 동안 여야 정치권은 여러 갈래로 손짓을 했다. 우선 현정권 출범 전 심재륜 검사의 행보를 잘 아는 구 동교동계 인사들이 그의 낙마를 아쉬워하며 항명을 자제시키려 했다. 심고검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 검찰 퇴진을 주장한 직후 동교동계 핵심 인사가 전화를 걸어 "조금만 참으면 기회가 주어질 텐데 왜 치고 나가려 하느냐"라며 아쉬움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그는 신주류로 대표되던 여권 핵심 세력이 '개혁 저항 세력이 준동했다'고 자기를 몰아붙이는 바람에 명예를 지키려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지난해 4·13 총선 때는 한나라당이 신정치 1번지라는 여의도(영등포 을)에 그를 출마시키려고 삼고초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심씨는 "정치 검사를 비판하고 물러난 내가 바로 정치권에 몸담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계의 김준엽 총장처럼 초연하게 남고 싶다"라며 고사했다.


이후 복직 소송을 벌이던 심재륜 고검장이 다시 한번 하마평에 오른 때는 지난해 김대통령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였다. 당시 여야 간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김대통령이 임기 말에 대통합의 정치를 펴도록 하자는 논의가 무르익었고, 실제 대표단이 구성되어 대연정을 위한 물밑 협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여야 대타협 체제의 법무부장관 후보로 심재륜 변호사가 거론되었다. 막판에 여야 관계가 틀어져 이 구상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연말까지만 해도 협상을 맡은 여야 중진들은 심재륜 변호사에게 사람을 넣어 법무부장관 카드를 타진했었다. 그러나 이후 정부·여당은 김중권 대표 체제를 택해 '강한 정부론'으로 정국을 이끌어 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심고검장이 복귀함으로써 현정부는 그의 거취를 새롭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와 현정권의 애증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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