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고속전철‘국회 역’에서 진퇴양난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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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타당성, 또 예산 심의 도마에 올라… 여야 한목소리 공격
“현재 예산(총공사비)이 5조6천억원인가?”

“그렇다.”

“10년 가까이 걸릴 텐데 공사비가 15% 이상 늘면 타당성이 없다. 15%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 앞에 장담할 수 있느냐 하는 얘기다. 이 사업은 과학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물론 교통부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검토했다고 하지만 국민들이 알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70년대 중반부터 논의되었다. 80년대에 들어와서 거의 10년에 걸쳐서 아주 많이 전문가 집단 또는 정책 당국자와 수차에 거쳐서 논의가 되었고 5차 5개년계획이 이미 전문가 집단의 찬반 토론을 충분히 거쳐 가지고….”

“10년간 논의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이 나라에서 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전문가들만 알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런 소상한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한정된 몇몇 사람끼리 이런 것을 밀실에서 비밀리에 논의해 왔다고밖에 볼 수가 없고… 이 계획상으로 빚을 갚는 데 몇 년 걸리나?”

“종류에 따라 다 달라서….”

“다 합쳐서 끝내는데….”

“15년에서 20년까지다.”

“개통되고부터 그런 것 아닌가?”

“그렇다.”

“공사비가 만약 늘어난다면 2030년이나 2040년께까지 빚을 갚아야 될 일이고, 그러면 이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엄청난 빚을 물려주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전국민이 관련된 사업이다.”

“…”

“이 문제는 정치권의 관심사가 되었으니까 재검토해 볼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나?”

“경부고속전철이 한두 해에 걸쳐 완공되는 것이라면 1∼2년 미룰 수 있겠지만 이것은 최소한 7∼8년 걸리는 사업이다. 지금 시작해도 2000년대 수송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14대 국회 제159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9차 회의. 교통부 등 4개 기관의 93년 예산에 대해 부별 심의하던 92년 11월7일 민주당 제정구 의원과 노건일 교통부장관과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제의원은 경부선 적체 구간을 없애는 작업(복복선화)을 우선해야 하므로 고속전철 예산(2천3백83억원)을 전액 삭감해야 한다며 질의를 끝냈다. 유인학·김인곤 등 야당 의원들도 고속전철 건설을 미루고 경부선을 복복선화하거나 경부고속도로를 하나 더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경부고속전철(고속철) 건설 사업에 대한 논란은, 한 해 전인 91년 예결위에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렸다. 이미 설계비로 91년 2백억원이 계상되는 등 국고에서 돈이 나가고 있었으나, 92년 6월 시험 구간인 천안∼대전 구간에서 삽질이 시작되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92년 예산안에 이 사업비로 천억원을 계상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3대 국회 말인 제156회 예결위 14차 회의가 열린 91년 11월22일. 민주당 김영도 의원은 임인택 교통부장관에게 고속철 사업을 꼭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라면서, 이 사업을 유보하고 92년에 계상된 사업비 천억원을 경인 복복선 전철 건설 사업과 전라선 개량 사업에 돌리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이경재·박석무 의원도 고속철 건설은 투자 우선 순위에서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데도 정부가 끝끝내 이 사업을 고집하는 것은 정치자금 때문이 아니냐는 항간의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임장관은 이렇게 답변했다. “2000년에는 경부 축의 물동량이 2배로 늘어난다. 대안은 세 가지다. 경부선에 새로운 고속도로를 건설하거나, 기존 선을 개량하거나, 고속철을 건설하는 것이다. 경부선 개량에는 2조3천억원이 들어가지만 5년이 지나면 용량이 초과한다.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하면 3조5천억원이 드는데 이 경우는 2015년까지 버틸 수 있다. 고속철은 5조8천억원이 들어 가장 비싸지만 2050년까지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돈이 가장 많이 들지만 획기적인 대안인 고속철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91년이나 92년이나 예결위에서 의원들이 공박한 수준은 원론에서 맴돌았고, 사람은 바뀌었지만 교통부장관의 답변도 거의 똑같았다.91년부터 단골로 올랐으나 예산은 무사 통과

고속철 건설의 타탕성과 경제성을 주장한 정부의 논리가 밀리는 양상이 전개된 것은 93년 예결위에서였다. 93년 6월 사업 계획이 전면 수정되면서 사업비가 10조7천4백억원(93년 불변 가격)으로 당초보다 두 배 가까이 늘고 공기도 2002년까지로 4년 늘어났기 때문이다.

93년 11월 30일 제165회 예결위 16차 회의에서 민주당 이해찬 의원은 사업비가 5조원 가까이 늘어난 이상 이 사업에는 타당성이 없다고 강도 높게 공격했다. 애초 고속도로 1개 건설하는 것과 비교해서 고속철 사업의 효용성을 이해하려 했는데 이제 2개 놓을 돈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전면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상대인 정재석 교통부장관은 재원 조달 문제와 관련해 민주당 김명규 의원의 공격에도 상당히 시달렸다.

94∼95년 예결위에서도 고속철 건설에 대한 타당성은 야당 의원들에게 정부를 공격하는 단골 재료로 사용되었지만 그 뿐이었다. 예산액 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양상이 달라 보인다. 과거에는 ‘물증’없이 타당성 없음을 주장하는 수준이었지만, 올해에는 야당 의원들이 물증을 갖고 집중 포화를 퍼붓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상리 터널에서 폐갱도가 발견되는 등 안전성 면에서 결함이 발견되었고 공사비가 앞으로 얼마나 늘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터여서, 이 사업은 누가 보아도 문제가 있는 사업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상원이 생길 것에 대비해 만든 널찍한 제2 회의장에서 여야 의원 50명 가운데 상당수가 경부 고속철을 성토했다. 그동안 무반응 또는 지지 의사를 표명하던 여당 의원조차 책임을 묻는 등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 올 예결위의 특징 중 하나이다. 서 훈·전석홍 의원 등이 그들이다.

11월14일 예결위 8차 회의에서 국민회의 이해찬 의원은 공사 중에 위험이 여러 번 발견되었는데도 이를 감춘 이유와 재원 조달 계획의 비현실성에 대해 따졌다. 이의원은 이자만 7천억~1조원인데, 연간 평균 운행 수입(1조4천억원)으로는 정상 운영이 불가능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민련 허남훈 의원은 정부의 실책으로 공기가 지연되어 연도별 투자 비율을 재조정해야 할 텐데 이에 따른 내년도 예산 감액 규모를 밝혀 달라고 거들었고, 국민회의 장영달 의원은 아예 백지화를 주장했다. 장의원은 지금까지 투입된 공사비가 1조3천2백21억원인데 이것은 거의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 것이라며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공격의 수위를 크게 높였다.

고속철 문제로 역대 교통부와 건설교통부 장관들은 곤욕을 치렀지만, 추경석 장관만큼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다. 추장관은 거듭된 공박에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 점에 대해 우선 주무 장관으로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저자세로 일관했다. 추장관은 미국 감리회사인 WJE사가 연말까지 전반적으로 정밀 안전 검검을 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 결과를 토대로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완벽히 보완하겠다고 했다. 그는 정확한 공기와 사업비(야당은 16조~17조원으로 추정), 부채 상환 계획에 대해서는 여러 현안 과제가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답변하기 어렵다며 이해를 구했다.

고속철에 대해서는 91년부터 96년까지 야당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였음에도 한 번도 예산이 깎인 적이 없었다. 야당은, 고속철은 하지 않았어야 할 사업이지만 대전까지 이미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대전까지만 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밀며 이후 구간에 대한 예산은 전액 삭감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동안 ‘비판 따로 예산 따로’였던 이 사업이 올해 삭감이라는 칼날을 맞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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