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북풍, 차단벽이 없다
  • 崔 進 기자 ()
  • 승인 1998.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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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국회→여권 무차별 난타…청와대 “오래 가면 손해” 파문 잠재우기 나서
꽃샘 추위가 쌀쌀하던 지난 3월14일 토요일 오후 3시께.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의 맏딸 결혼식이 치러지던 서울 강남구 반포동 남서울교회. 20분째 예식장 밖에서 떨고 있던 문희상 정무수석은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고 중얼거렸다. “올 때가 지났는데…, 중요한 용건이 도대체 뭘까?” 나오겠다던 사람은 30분이 지나서야 핸드폰으로 근처 호텔에서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오후 4시께 ㄹ호텔 커피숍. 허겁지겁 달려온 정대철 국민회의 부총재는 두툼한 노란 봉투 하나를 내놓으면서 말했다. “정말 엄청난 겁니다. 북풍이에요, 북풍!”

문제의 ‘이대성 문건’이 마침내 음지에서 양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정부총재는 친구인 이대성 전 안기부 해외조사실장에게서 건네받은 문건을 이 날 뒤늦게 문수석에게 전달한 것이다. 문수석은 봉투를 뜯으려는 정부총재의 손을 잡으며 “아무래도 보통 내용이 아닌 것 같은데 (봉투를) 뜯지 말고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자”라고 말했다. 봉투는 다음날 오전 7시께 김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이 날 오전부터 언론에는 이대성 문건의 내용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성 문건. 그것은 북풍의 흐름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당초 북풍 수사의 본질은 DJ의 집권을 막기 위해 북한과 뒷거래한 안기부와 구 여권이 관련되었는지 여부를 규명하는 것이었고, 적어도 이대성 문건이 돌출하기 전까지는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배후에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한 구 여권 인사들이 개입되었다는 혐의가 고구마 줄기 뽑히듯 속속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김대통령의 안기부 개혁은 더욱 힘을 얻었고 한나라당은 궁지에 몰렸다.

이대성 문건·권영해 자살 기도 후 진로 아리송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튀어나와 상황을 역전시킨 것이 이대성 문건이다. 그것도 정대철 부총재라는 절묘한 창구를 통해서. 이대성 문건은 김대통령을 비롯해 국민회의 의원들도 북풍에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담아 순식간에 전세를 뒤집어 놓았다. 그동안 수세에 몰려 있던 한나라당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권영해 전 부장이 할복 자살을 기도하면서 상황은 한층 복잡하게 얽혀 돌아갔다.

그러자 청와대도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청와대는 현정권 출범 이후 김종필 총리 인준 파동에 이어 두 번째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로 북풍 정국의 심각성을 나타냈다. 사실 청와대는 이대성 문건이 지난 3월15일부터 언론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 문건이 어느 세력으로부터 어떠한 의도로 나왔는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안기부가 어떤 곳인가. 40여 년 동안 DJ를 ‘연구’해 온 정치 프로들이 모여 있는 1급 정보기관이다. 이런 안기부를 상대로 싸우려 했으니 권력 핵심부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청와대의 아마추어 비서관들로서는 버거울 만도 했다.

청와대는 최근에야 이대성 문건이 노리는 의도와 정치적인 이해 득실을 판단하게 되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이대성 문건의 배후를 북한측의 공작과 안기부측의 반격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했다. 요컨대 북한이 안기부 창구를 통해 김대중 정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역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는 궁지에 몰린 수구 세력 특히 안기부 내부 세력이 반격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청와대측이 특히 눈여겨 보고 있는 대목은 수구 세력의 반격이다. 실제로 안기부의 고위 관계자와 검찰 관계자 들은 이대성 문건 파동이 북풍 사건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안기부내 기득권 세력의 치밀한 교란 작전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거기에다 권영해 전 부장이 자살을 기도한 사건은 수구 세력의 결집을 촉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애당초 안기부 개혁의 기폭제였던 북풍이 국회를 강타하더니 이제는 여당 쪽을 향해 몰아치고 있는 셈이다.

이래저래 청와대가 3월24일 현재까지 뽑아 본 북풍 계산서에 의하면, 한마디로 ‘손해 막심’이었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 없이 김대중 대통령 관련 대목이 불거져 여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혔을 뿐 아니라 안기부 개혁에 제동이 걸렸다. 국가 정보력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난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권영해 전 부장이 할복 자살을 시도함으로써 바야흐로 북풍의 불똥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가뜩이나 대규모 실업으로 국민의 불만이 증폭되고 있는 마당에 정치마저 계속 불안하게 돌아갈 경우 결국 타격을 입는 쪽은 여권이다. 이제 북풍은 가라앉히는 게 좋다.” 요즘 여권 핵심부 심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청와대, 고급 정보 못 얻어 더욱 곤혹

물론 여권이 북풍을 통해 얻은 것도 있다. 안기부가 그동안 온갖 정치 공작을 저질러 왔고, 거기에 한나라당 인사들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정황들을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한나라당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정재문 의원의 3백60만달러 대북 뒷거래설은 한나라당을 곤경에 빠뜨렸다. 하지만 이러한 득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청와대측 판단이다.

여권 핵심부가 서둘러 북풍 가라앉히기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김대통령이 3월19일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으로부터 주례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북풍 문제는 안기부와 검찰 등 수사기관이 밝힐 것’이라고 말한 배경도 북풍이 더 이상 정치권으로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중권 비서실장은 정국이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고 북한에 빌미를 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어 “북풍이 조속히 종결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북풍은 광풍으로 변했다. 적과 아군이 따로 없이 덮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발을 빼고, 검찰과 안기부가 처리해 가는 상황을 지켜 보자는 것이 청와대측 전략인 것 같다. 대통령은 오직 경제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이번 이대성 문건과 권영해씨 자살 기도 파동을 계기로 좀더 조용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개혁 작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개혁은 소리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개혁은 소리나지 않게 해야 부작용도 적고 효과도 크므로 조용하게, 그러나 할 때는 과감하게 해야 한다”라고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그는 또 여론과 국익이라는 두 개의 잣대를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안기부 개혁의 경우 북풍 내막을 모조리 공개하라는 여론에 떠밀려 대북 채널을 차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도 않겠지만, 국익을 이유로 얼렁뚱땅 넘어가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잣대를 적절히 활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청와대 관계자들은 익히 알고 있다.

청와대가 김종필 총리 인준 정국에 이어 이번 북풍 정국에서 또 하나 애를 먹고 있는 대목은 정보력 부재이다. 예컨대 안기부나 경찰 등 정보기관이 청와대에 정기적으로 보내던 정치 정보가 현정권 들어 거의 끊겼을 뿐 아니라, 가끔 보내는 정보도 B급 이하라는 것이다. 경찰 역시 대규모 인사에 따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청와대 비서진이 모든 전략을 짜야 하는데, 현재의 비서진 인력으로는 턱없이 역부족이다. 결국 국민회의가 이 공백을 채울 수밖에 없지만, 지금 당은 그런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언론도 문제다. 이대성 문건 이후 북풍 내막 캐기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는 언론을, 김영삼 정권 시절의 이원종 정무수석처럼 강하게 통제할 사람도 없고 또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북풍은 크게 확산될 경우 안기부를 개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권 전체를 변화시키는 일진 광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이회창 한나라당 명예총재가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도 전해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풍을 막는 과정에서 김대통령이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

이유가 어떠하든 정치권이 대권을 위해 북한측과 암중 접촉했다는 것은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북풍을 일으키려고 했던 집단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북풍을 막으려던 집단이 주춤거리는 역풍 현상이 일고 있다는 것이 청와대측 진단이다. 청와대는 이번 북풍 사건을 교훈 삼아 더욱 체계적이고 세련된 개혁 작업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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