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끝낸 대표' 한화갑
  • 이숙이 기자 (sookyi@e-sisa.co.kr)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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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단합·쇄신 최적임자로 거론…시기 놓고 '대권 득실' 저울질


요즘 민주당은 언론 전쟁을 치르느라 딴생각을 할 틈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권 핵심부에서는 당정 쇄신을 위한 작업이 조심스레 진행되고 있다. 언론 문제만 가지고 마냥 정국을 끌고 갈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언론사 세무 조사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4∼5% 정도 올라갔는데, 정당 지지도는 아직 답보 상태다. 당정쇄신책이 나와야 비로소 당 지지도가 움직일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가뭄과 언론사 세무 조사를 핑계로 미루어놓은 DJ의 쇄신 약속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민주당의 한 전략가 역시 7∼8월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분석했다. 20%까지 곤두박질친 당 지지도가 언론사 세무 조사를 계기로 하락 행진을 멈춘 만큼, 이 기회에 그동안 떨어져 나간 민주당 지지층을 재결집해야 올 하반기부터 플러스 알파를 끌어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에 대해 청와대 핵심부도 공감하는 분위기다. DJ의 한 핵심 측근은 "DJ가 즉각적인 쇄신을 미룬 이유가, 첫째, 밀려서는 안 한다, 둘째, 그럼 대안이 뭔가라는 고민 때문이었던 것으로 안다. 더 미룰 수 없는 만큼 조만간 쇄신책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황이므로 늦어도 8월 중순까지는 DJ 쇄신안이 나오리라는 것이 여권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쇄신 시점이 얼추 드러나면서 당 안팎의 관심은 과연 누가 차기 당 대표를 맡느냐에 쏠리고 있다. 다음 당 대표는 내년 민주당 전당대회 때까지 임기가 이어지는 만큼, 누가 당 대표를 맡느냐가 차기 대선 구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대표 0순위로 거론되는 인물은 한화갑 최고위원이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차기 당 대표가 '단합'과 '쇄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적임자가 한위원이라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풍 파동 이후 여권의 무게 중심은 부쩍 한위원 쪽으로 쏠리는 모양새다. 그 힘의 원천은 역시 대통령의 신임이다. 한위원은 최근 들어 대통령과 수시로 독대하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정국 운영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알려진다.


당장 신·구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던 동교동이 한위원 중심으로 다시 뭉치는 양상이다. 6월21일 한위원이 권노갑 전 최고위원과 가까운 부위원장 80여명을 초청해 점심을 한 사례가 상징적이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동교동계의 소외감을 표출했고, 한위원은 '씨받이론'을 내세워 이들을 다독였다.


여권의 소식통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최근 권노갑씨와 가까운 김옥두 사무총장과 한위원을 따로 불러 "동교동계는 한위원 중심으로 뭉치고, 한위원은 권 전위원의 역할을 인정하라"고 교통 정리를 했다는 후문이다. 동교동계를 기반으로 하여 다음 대선을 치르려는 DJ가 대외 활동에 제약이 많은 권씨 대신 한위원에게 동교동 대표성을 부여하고, 내부적으로는 권씨의 역할을 인정하도록 언질을 준 것이다.


동교동 대표성을 획득한 한위원은 여권 쇄신에도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정풍파를 비롯한 당 내부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그는 DJ에게 '국민에게는 감동을 주고, 공직자에게는 긴장감을 조성하는 획기적인 인사 개편'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위원은 또 이번 언론사 세무 조사를 개혁파를 규합할 절호의 기회로 본다. 그의 한 핵심 측근은 "그동안 한위원은 당내 분파주의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 때문에 개혁파와 연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언론 전쟁을 계기로 명분이 생긴 만큼 이번 기회에 한화갑·김근태·노무현 삼각 연대를 강화할 계획이다"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세 사람은 언론 전쟁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트로이카 구실을 하고 있다.


한화갑, 외교 활동으로 위상 강화 '박차'




이렇듯 한위원이 '단합'과 '쇄신'의 연결 사슬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레 '한화갑 대표설'이 무르익고 있다. 그런데 한화갑 대표설을 놓고 한위원 주변에서는 두 가지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하나는 이번이 당 대표를 할 수 있는 최대 고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때가 아니니 좀더 기다리자는 주장이다.


'지금'을 외치는 사람들은 이번에 당 대표를 거머쥐어야 인지도를 높이고 리더십을 세워 내년 전당대회 때 대선 후보 자리를 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당의 역학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때문에 '지금'론자들은 최고위원 경선에서 1등한 사람이 대표를 맡아야 당에 힘이 실린다는 논리를 암암리에 설파하고 있다.


반면 '다음'을 외치는 사람들은 지금 당 대표를 맡아 보았자 상처만 난다는 주장이다. 풀어야 할 난제가 잔뜩 쌓여 있는 데다, 한위원이 대표로 나설 경우 경쟁 주자들이 일제히 견제에 나서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당 차기 주자들 사이에서는 한화갑 대표설이 현실화할 경우 어떤 식으로든 '대권 포기 선언'이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따라서 그럴 바에야 내년 전당대회에서 아예 차기 대선 주자와 당 대표를 한꺼번에 거머쥐자는 것이 '다음'론자들의 논리다. 한위원은 당 일각에서 당권·대권 분리론이 나왔을 때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다음'론자들을 중심으로 '김근태 대표론'이 나오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바 '징검다리론'인 셈이다. 개혁성과 비전은 뛰어나지만 당내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한 김위원을 이번에 당 대표로 내세워 쇄신도 하고 경쟁 주자들의 거부감도 덜자는 것이다. 이미 한위원과 김위원 사이에 이런 얘기가 오갔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이에 대해 김위원 진영에서는 "이게 다 김위원을 만만하게 본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 불쾌하지만, 일단 능력을 발휘할 기회라는 점에서 불감청 고소원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한화갑 대표설을 둘러싸고 다양한 계산법이 나오는데, 정작 한위원은 해법을 나라 밖에서 찾고 있다. 7월9일 한·독 의원 친선협회 의장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는 7월20일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을 만나고, 8월 초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딕 체니 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럼스펠드 국방장관 같은 행정부 고위 인사를 만날 예정이다. 그의 외유는 모두 DJ의 대북 포용정책을 홍보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미 독일에서는 독일 의회로부터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적극 지지하는 '한반도 평화·안정·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이끌어 냈고, 북한에 가면 김정일 위원장 답방을, 미국에 가면 북·미 관계 개선을 촉구할 계획이다.


이런 외교 활동은 한위원에게 일석삼조의 효과를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한국 대선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정가에 고급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DJ의 대북 외교 정책을 뒷받침한다는 측면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점수를 따고, 국민들에게도 차세대 외교 리더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월 말 미국 의회 지도자 15명을 만나고 온 후 한위원은 DJ로부터 상당한 격려를 받았다.


'외곽을 쳐서 안을 움직이려는' 한위원의 대권 전략은 과연 유효할지, 한화갑 대표론은 과연 현실로 나타날지가 언론 정국의 막후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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