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비주류 "이인제로는 필패"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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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 경쟁력 회의론


ㄱ장관은 최근 민주당 이인제 상임고문으로부터 후보 경선 때 지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그러나 선뜻 응낙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고문에게 영남 표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본선 경쟁력이 있느냐는 우회적인 힐난이었다. 완곡한 사양 표시이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을 겸하고 있는 그는 권노갑 전 고문과 가깝고, 쇄신파 의원들과도 통하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입각하기 전까지 그는 이인제 고문과 가깝다고 분류되곤 했다.

ㄴ 의원은 동교동계 구파 초선 의원이다. 그도 얼마 전까지 친 이인제 성향이었다. 그런데 최근 심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측근들에게 ‘이인제로 이길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정계 개편’도 그가 사석에서 자주 입에 담는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민주당에서 이인제 고문의 본선 경쟁력을 문제 삼는 주장이 나온 것은 오래 전부터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은 과거의 관성적인 주장과는 분명히 다르다. 동교동계 의원이나 이른바 당권파 안에서도 이같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쇄신연대에 속해 있는 한 의원은 “이인제 고문을 후보로 뽑자는 말은 야당 하자는 말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인제 후보 불가, 세 가지 이유 있다”


민주당 일부에서 ‘이인제 필패론(必敗論)’이 확산되는 조짐이다. 민주당의 쇄신 국면이 끝나가고 본격적인 경선 국면이 시작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진짜 승부다. 싸움의 화두는 누가 후보가 될 것인가이다.


이인제 필패론과 이인제 대세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 민주당 대선 구도는 양강 구도니, 3강 구도니 하는 식으로 불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인제 고문의 독주가 시작되었고, 구도 또한 이인제 대 반 이인제로 좁혀졌다. 다시 말해 민주당 경선 구도는 이인제 고문이 후보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로 변했다. 한화갑 고문과 쇄신연대 소속 의원들을 비롯한 당내 ‘비주류’가 이인제 필패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도 이인제에게 대적할 대항마가 마땅치 않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이인제 고문이 후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는, 이고문의 본선 경쟁력이다. “이고문은 이번 대선 또한 지난번과 같이 호남과 충청의 지역 연합으로 치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영남 포기’ 전략은 1997년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쇄신연대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 대선 때는 이인제 후보가 영남 표를 분산시켰기 때문에 DJ가 이길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결과를 가져올 영남의 제3 후보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인제 학습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는 논리다.


두 번째는, 정체성 시비다. 민주당은 지난 10·25 보궐 선거에서 전패했다. 무엇보다 서울 두 곳에서 패한 것은 민주당에 뼈아픈 일이었다. 이 두 곳은 지난 대선 때 김대통령이 이회창 후보를 누른 곳으로, 수도권 민주당 전통 지지층의 이반이 확인된 셈이다.


동교동계의 전횡과, 언론에 수시로 보도되었던 이들의 비리 혐의가 이런 이반의 상당한 원인임은 분명했다. 이는 또한 철저히 쇄신하는 것 외에는 민주당이 살 길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인제 고문은 그 ‘당을 망친’ 동교동계를 최대 후원 세력으로 하고 있다. 쇄신된 당의 후보로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고 동교동 구파가 생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현재 상황이 이고문에게 유리한 것도 아님은 물론이다.


한나라당 개혁파의 움직임도 민주당 일부의 이인제 비토에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화해와 전진 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몇몇 한나라당 인사들은 정계 개편에 몸을 실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에서 개혁파 후보가 나설 경우 이들을 끌어당길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런데 이인제 후보로는 흡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민주당 개혁 세력의 판단이다.


세 번째는, ‘거품 지지율’ 공방이다. 이고문 지지 기반은 민주당 텃밭인 호남과 ‘투표율이 낮은’ 20대에 주로 걸쳐 있다. 다시 말해 소유권이 이고문에게 있다고 할 수 없는 표인 셈이다. 또한 지역 기반인 충청권은 이미 3분된 지 오래다. 싸움 상대인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비교할 때 이는 이고문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회창 총재는 대안 부재론 때문이기는 하지만, 영남권이라는 배타적 지지 기반을 업고 있다. 같은 당 노무현 고문마저 주요 지지 기반이 실제 표로 연결될 확률이 높은 30대 연령층이다.


“정체성 갖춘 후보나 영남 후보 나서야”


따라서 민주당 일부에서는 이인제 고문 대신 정체성을 갖춘 후보나 영남 후보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구체적인 대안을 상정한 주장은 아니다. 노무현·정동영·김근태 고문은 물론 심지어는 당 밖 인사인 정몽준 의원이나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까지 대입되곤 한다. 정계 개편론도 이런 차원의 대안 논리 중 하나다. 최근에 등장한 역할 분담론이니 당권 장악론이니 하는 것들은 이런 대안 논리에 좀더 살집이 붙은 ‘실행 파일’들이다.


역할분담론은 개혁 정체성을 가진 세력과 당내 기반을 가진 세력, 그리고 영남 돌파가 가능한 세력이 뭉쳐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논리다. 다시 말해 쇄신연대 소속인 김근태·정동영 고문과 한화갑 고문, 노무현 고문이 역할을 분담해 연대해야 한다는 것.


당권장악론도 같은 맥락. 3월 전당대회에서 이인제 고문이 후보가 되더라도 당권만 장악하고 있으면 또 한 번 기회를 얻게 된다는 논리다. 즉 지방 선거 승패는 수도권에서 가려질 수밖에 없는데, ‘이인제 후보’로는 떠난 수도권 민심을 잡기 힘들고, 수도권에서 2석 이상 잃을 경우 정계 개편과 후보 교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이 경우 당권을 잡고 있어야 정계 개편과 후보 재선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쇄신연대 일부에서는 이미 한화갑 고문이 대권 도전을 접고 당권 쪽으로 선회하도록 설득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이런 민주당 비주류들의 궁리가 성공할 가능성은 아직 ‘낮다’. 정치 세력화로 나아가기에는 내부의 구심력이 없고, 이인제 고문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도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인제 필패론은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 차원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사람과 엮이면 힘이 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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