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기둥 세워 ‘신당’ 집 짓자?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2.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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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정계 개편 논의 ‘급물살’, 2월 창당론 대두…대선 주자들 “경선 이후에”

대통령 후보 경선 국면으로 자연스레 흘러가던 정치권의 흐름이 갑자기
주춤하고 있다. 정계 개편이라는 돌출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최대의 의원 모임인 중도개혁포럼(회장 정균환 의원)이 내각제 공론화를
거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벌써 한화갑·정대철 상임고문, 김한길
전 의원 등 민주당 중진들이 이 ‘담론’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민국당 김윤환 대표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도 거들고 나섰다. 임기중
내각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JP는, 중도개혁포럼
발표 직후 중도개혁포럼 소속인 민주당 송석찬 의원과 20여 분간 단독으로
만났다. 이후 “내각제를 실현하고 물러날 후보가 있다면 지원하겠다”라는
말이 JP의 입에서 나왔다.


JP “내각제 실현할 후보를 지원하겠다”


정계개편론은 사실 민주당 주변을 떠돌던 오랜 화두다. 거기에는
독자적으로 재집권하기 어렵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 이번 중도개혁포럼의
내각제 발언도 이런 당 안팎의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자민련과 민국당은 물론 한나라당 일부까지 아우르는 정계
개편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고리로 이들과
연대할 수밖에 없다.’ 1월23일 가진 중도개혁포럼 소속 의원들의 대화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이런 인식은 어느 정도는 이인제 고문을 포함한 민주당 내 범주류의
공통 인식이기도 하다. 이고문은 이미 지난해 말부터 자민련과 합당할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중도개혁포럼의 내각제 공론화 논의가 공개된
후에도 그는 “내각제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고문의 말은 당장 정계 개편에 나서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국민 경선제를 사실상 다듬어낸 데다가 안정적 1인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고문이 현재의 당내 경선 판도를 깰 필요성은 없었던 것. 후보
선출 후나 지방 선거 후에 정계 개편에 나서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계 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2월 신당 창당론’이
초점으로 떠오르자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정계 개편이라는 ‘마지막’
카드가 미래의 전략이 아니라 당장 개봉해야 할 실행 파일로 변해버린
것. 조기에 정계 개편을 하자는 주장은 민주당 정대철 상임고문, 김한길
전 의원과 민국당 김윤환 대표가 주도하고 있다. 폐기된 듯 보였던 김윤환
대표(허주)의 이른바 ‘허주 구상’도 부활하는 조짐이다.



김윤환 대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민주당이 중심을 이루되, 한나라당
비주류와 자민련·민국당 세력을 아우르는 신당을 만들어야 대선에서
이회창 총재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김대표는 특히 민주당 후보가
결정되기 전에 신당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후보가
결정될 경우 기득권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민주당 후보는 야당의 반DJ
공세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본선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것. 2월 말은
그런 신당 창당의 마감 시한인 셈이다.


민국당 김윤환 대표와 김상현 상임고문은 최근 정균환·정대철
의원, 김한길 전 의원 등 민주당 주류·비주류 인사들을 다각도로
접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민국당 소속이면서 민국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이수성 전 총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JP를 만나
이원집정부제를 제의하기도 했다.


허주 구상과 궤를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화갑 고문도 조기 정계
개편에 적극적이다. 그는 최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방 선거
전에 자민련과 합당하는 것이 유리하다”라고 말하고, 합당을 위한 당내
추진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고문은 양자 구도를
전제로 하는 ‘반이회창 연대’에는 회의적이다. 현재의 경선 구도는
깰 필요가 있되, 헤쳐 모여 식으로 다시 여야 양대 구도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한고문측의 생각이다. 이른바 다자 구도가 되어야만 자기
역할이 생긴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과연 2월 정계 개편과 범여권 신당 창당은 가능할까. 추진 주체들이
여권의 주류가 아니라는 점이 실현 가능성을 낮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이후, 이러한 정계 개편을
이끌 만한 구심점이 민주당 안에 없다는 점도 어려움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 당내 최대 주주인 동교동계는 지난 연말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인제 고문측, 2월 정계 개편에 강력 제동


무엇보다 당내 대다수 대선 주자들의 반발이 크다. 특히 이인제 고문측의
반격이 예사롭지 않다. 내각제 공론화 직후만 해도 객관자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고문측은, 논의가 2월 정계 개편 쪽으로 흐르자 강력히 제동을
걸고 있다. 경선 국면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나아가 당내에서 이인제 배제 전략이 되살아나는 것을 경계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이고문측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정치 일정이 진행중인데 갑자기 개헌 논의를 끄집어내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인제 흔들기가 아니라 민주당 흔들기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계 개편 논의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물론 이인제 고문 등이  정계 개편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닌
만큼, 정계개편론 자체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이인제 고문측의 한
인사는, 후보가 된 다음에는 본선 승리를 위해서 정치 연대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검토가 (내부에서) 있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도 민주당 단독 승부가 어려운 만큼 2월 정계
개편 논의가 불발되더라도, 경선 이후에 제2, 제3의 정계 개편 논의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내각제 개헌론과 정계 개편 논의의 물꼬를 튼 것이 중도개혁포럼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중도개혁포럼은 정균환 의원이 회장이며, 한광옥
민주당 대표가 후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이 모임을
자의대로 이끌 만한 힘은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 민주당 한 관계자의
말이다. “중도개혁포럼은 대통령 친위 조직으로 만들어졌던 만큼 대통령과
단절되는 순간 결속력이 없어지는 조직이다. 그런 모임에서 내각제 개헌론처럼
민감한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은 참 미묘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의구심이다. 김한길 전 의원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같은 의혹이 일고 있다.


물론 중도개혁포럼의 내각제 공론화 소식이 전해진 이틀 후, 김대중
대통령은 오홍근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이렇게 강조했다. “정치 불간여는
국민에 대한 약속이고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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