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스공사 '담합 입찰' 비리 의혹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7.07.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류 변조해 ‘들러리 응찰’…피해 본 일본 회사들 소송 고려
우리나라 한 국영 기업체의 공사 수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담합 행위가 외교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 건설업계에서는 공공 공사 수주에서 담합이 어느 정도 관행이 되어 있으나, 국제적인 분규로까지 발전한 예는 없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한국가스공사(사장 한갑수)가 지난 6월7일 입찰한 인천 LNG(액화천연가스) 인수 기지 2단계 2차 확장 공사이다.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LNG를 받아 저장하는 대형 인수 기지를 인천 지역에 건설하고 있는 가스공사는 입찰일 3일 전에 공고를 내고 총 4천2백억원 규모의 LNG 탱크 4기 건설에 대한 입찰을 실시했다.

가스공사는 고도의 압축 기술이 필요한 이 탱크 건설을 위해 입찰 자격을 외국 전문 업체와 기술 제휴가 되어 있는 업체로 제한했다. 이런 자격 조건을 엄밀히 적용할 경우 2천2백억원 규모의 20만kℓ급 2기 공사(일명 제 2그룹 공사)는 유찰될 가능성이 높았다. 입찰에 참여한 회사 가운데 대림건설이 삼성물산·(주)대우와 공동 구성한 컨소시엄을 제외하면 외국 업체와 기술 제휴선을 가지고 있는 참가 업체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격이 있는 입찰 업체 1개만 응찰할 경우 공공 공사 입찰 규정에 따라 입찰 전체가 무효가 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입찰이 유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림건설 컨소시엄은 다른 업체에게 자기들이 일본 회사들과 맺은 계약서인 기술제의서(Technical Proposal)를 불법적으로 변조해 주고 입찰에 참여하도록 종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들러리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국제적 통상 마찰 빚을 수도 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이런 경우 낙찰 업체는 들러리를 서준 업체에게 통상적으로 커미션과 다음 발주분에서의 반대 급부를 약속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이런 식의 담합 행위에는 불법과 편법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지만, 국내 업체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관행이었다.

약 2천억원 규모의 제 1그룹 공사(14만kℓ급 2기) 역시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의 담합이 있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현대건설이 낙찰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술제의서 작성이 가능한 다른 업체를 끌어들여 유찰을 방지했으며, 대신 ‘들러리 업체’는 평택 LNG 추가 공사에서 반대 급부를 확약받았다는 것이다.

문제가 복잡해진 것은 일본의 기술 제휴 업체들이 자신들의 기술제의서가 변조된 사실을 눈치채면서였다. 즉 이들은 아무 관련도 없는 업체들이 서류상으로는 자신들과 기술 제휴를 맺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업체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으나, 이 문제가 건설업계에 널리 알려지는 과정에서 파악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업체들과 맺은 기술 제휴 계약이 변조되어 직·간접으로 피해를 보게 된 업체들은 이시카와 중공업(IHI)을 비롯해 일본의 4개 기업. 이들은 현재 피해 업체간 협의를 통해 특허권 침해 소송을 포함한 법적 대응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IHI사는 대응 방안을 묻는 <시사저널>의 서면 질의에 대해 아직 공식적인 방침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를 통해 간접으로 확인되는 일본 업체들의 정서는, 정부의 국책 사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기술제의서 변조에 관여한 업체들과 가스공사측은 실무자들을 일본에 보내 제휴선을 무마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제는 간단히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만일 일본 업체들이 소송이라도 걸어 오면 LNG 탱크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프랑스 역시 여기에 가세해 국제적인 통상 마찰이 빚어질 수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이 문제는 지난 6월 하순 감사원의 특별 감사 대상으로 떠올랐다. 3명으로 구성된 감사원 특별감사반은 현재 이 입찰에서 저질러진 부당 행위를 밝히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감사반은 특히 입찰에 참가한 국내 업체들이 일본 업체들과 기술 제휴를 맺은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즉 입찰에 참가한 업체들이 가스공사로부터 입찰 관련 정보를 미리 빼내 해당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유수 업체를 전부 독점해 놓은 상황에서, 다른 입찰 업체들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였으리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스공사는 현재 이 문제가 입찰 업체들 간의 문제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그러나 가스공사는 이번 정부 들어 대형 공사 입찰을 여러 차례 하면서 각종 이권 관련 혐의가 포착되어 사정 당국의 내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지난해 본격화했던 이 내사는 특별한 이유 없이 중단되었다(상자 기사 참조). 정부의 한 관계자는 “가스공사가 자료 조사에 비협조적인 것을 포함해 해당 업체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특별 감사에 불응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감사원은 이번 담합 건말고도 과거 가스공사가 저지른 각종 비리에 대해서도 손을 댈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