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비 문서, 스카우트방지협정
  •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6.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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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스카우트 방지 담합으로 ‘직업 선택의 자유’ 박탈… 사용자측 “불가피하다” 주장
김대중 대리는 94년 6월 대신증권에 사직서를 내고 교보증권 경력 사원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당시 한 달에 60억원 정도씩 약정고를 올린 김대리는 대신증권 인천지점에서 가장 뛰어난 영업 실적을 보였다. 그러다가 동료 9명과 함께 경력 사원 공채에 합격하여 교보증권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김대리는 새 회사로부터 발령을 낼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증권업협회가 93년 12월에 맺은 ‘회원간 질서 유지에 관한 협약’에 따라 1년 후에나 발령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리는 꼼짝없이 시한부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한국산업증권 수원지점에 근무하는 정영수 대리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친 약정고 경쟁에 지쳐 쌍용투자증권을 그만두고 한국산업증권으로 옮기려다 7개월간 실업자 신세를 겪었다. 현재 이런 고초를 겪고 있는 직원들이 교보증권에만 10명이 넘는다. 증권사 직원들로부터 이런 민원이 쏟아지자 증권사노동조합협의회(증노협·의장 이정원 쌍용투자증권 노조위원장)는 5월10일 공정거래위원회에 스카우트방지협정 승인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증노협은 스카우트방지협정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15조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관계 법률에 대해서도 위법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광택 교수(국민대·노동법)는, 스카우트방지협정은 근로기준법 31조 2항에 있는 ‘취업 방해를 위한 사전 통신의 금지’ 조항을 위반하고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23조에도 명백히 위배된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도 이 협정의 위법성을 조사하고 있다. 경쟁국 단체과 김범조 과장은, 증노협이 제출한 민원이 사실이라면 스카우트방지협정은 위법이 틀림없고, 조사가 끝나는 대로 이에 대한 적절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이 협정을 놓고 논란이 심해지자 증권업협회는 5월27일 모임을 갖고 스카우트방지협정의 실효성과 부작용을 재검토하고 협정 존폐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한다.
그런데 스카우트방지협정은 증권업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해운·통신·철강·스포츠 등 여러 업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증권 업종처럼 강제력이 있는 것도 있고 조선 업종처럼 느슨한 것도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신설 통신업체가 우후준순 격으로 생김에 따라 통신업계 간에 인력 쟁탈전이 심하다. 특히 한국통신·한국이동통신·데이콤 같은 기간통신망 업체에 근무하는 숙련 기술자들이 스카우트 대상이다. 통신업체들은 그 대비책으로 지난해 말 ‘기간통신 사업자 간의 인력 채용에 관한 기본 협력 사항’을 체결해 우수 인력 유출을 막고 있다.

임의 규정 제정·개정에 소급 적용까지 멋대로

조선업체들도 94년 8월 ‘고용 질서 확립 방안’을 마련하여, 경력 직원이 입사하더라도 다른 조선소 출신임이 확인되면 입사를 취소하게 했다. 그런데 워낙 인력이 부족한 조선업체로서는 이 협정을 지킬 수가 없는 실정이라 이젠 유명무실해졌으나 협정 초기에는 꽤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9월에는 8개 투자신탁회사 기획부장들이 모여 ‘제3차 건전경영추진위’를 구성하고 증권사로 인력이 유출되는 상황에 공동 대처하기로 결의했다. 지난해 8월 발표된 금융산업개편안에 따라 증권사가 투자신탁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자 증권사로 대규모 인력 유출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한국투자신탁사 대리급 직원이 일은증권 과장으로 옮기려다 실패하고 원직에 복귀한 적이 있다. 한국투신사가 일은증권에 주식 주문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일은증권이 굴복한 것이다. 입사할 때 서약서를 받아놓는 경우도 있다. 한진해운 인사부 김종훈 대리는, 한진해운에서는 입사할 때 퇴직 후 5년간 경쟁 회사에 취직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한다고 말했다.

스카우트 제약이 가장 엄격한 분야는 스포츠계이다. 사용자 단체가 일방적으로 만든 규율이 선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자의로 개정할 수도 있다. 스타도 예외가 아니다. 농구계에서 국내 최고 센터로 자타가 공인하는 서장훈은 스카우트 파문 때문에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에서도 탈락했다. 서장훈(연세대 3)이 연세대에 대한 지명권을 가지고 있는 진로농구단 입단을 거부하고 한국남자농구실업연맹 결정에 대한 무효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서장훈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한국남자농구실업연맹은 자체 규약을 통해 새로 창단한 팀은 한두 대학의 3학년 선수에 대한 배타적인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LG농구단은 고려대를, 진로농구단은 서장훈이 있는 연세대를 각각 지명했다. 그런데 서장훈이 2학년을 마치고 미국 샌호제이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스카우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실업연맹은 서장훈이 특정 팀 입단을 거부하기 위해 ‘도피성 유학’을 갔다왔다고 판단하고 규약을 개정했다. 그래서 연맹은 지명대상 선수의 기준을 특정 학년에서 입학 연도로 바꾸고 서장훈의 경우에 소급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장훈측은 이 결정에 강력히 반발하고 서울지법에 지명권 무효확인 소송을 냈다.

프로 야구 선수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에서는 프로 선수 계약서를 노비 문서에 비유한다. 소속 구단이나 지명권을 가진 구단의 허락 없이 다른 구단에 가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이 지명한 선수는 다른 팀으로 갈 수 없다. 굳이 다른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면 2년 동안 아마추어 팀에서 활동하든지 선수 생활을 중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2년 후에 자신이 원하는 팀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운동 선수가 몇년간 공백을 딛고 재기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 선수들이 굴복하고 지명 구단에 입단한다.
임선동 선수는 이러한 연고 지명권에 반발하고 있다. 임선동은 휘문고 3학년때 LG트윈스 구단이 지명하여 입단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되어 연세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 LG트윈스와 재협상을 시도했다가 국내 최고 대우를 약속한 아마추어팀 현대피닉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 다이에호크스와 계약을 체결해 일본 진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LG트윈스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일본프로야구기구(JBO)가 맺은 한·일 야구선수계약협정에 의하면 지명권을 가진 구단이 지명한 선수는 스카우트할 수 없다. 임선동은 서울지법에 지명권 무효확인 소송을 내어 5월16일 승소 판결을 받았다.

본안 소송 전에 있었던 가처분소송 결심 공판에서 서울지법 남부지원 김태웅 부장판사는, 한국야구위원회의 드래프트 제도는 일종의 카르텔이어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위배되고 헌법15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LG트윈스는 임선동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런데 이 판결도 효과가 없었다. LG트윈스와 한국야구위원회는 계속 임선동 선수를 풀어주지 않고 있다.

“스카우트될 때 기밀 빼간다”

한편 사용자단체가 제정한 스카우트방지협정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지나친 스카우트 열풍이 급격한 임금 상승을 초래하여 기업 비용을 증가시키는가 하면 인력이 유출된 회사가 영업 마비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또 회사가 몇년 동안 상당히 투자해서 키운 인재를 인재 양성에 소홀한 회사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고 데려간다면 어느 회사도 인재 양성에 예산을 배정하지 않을 것이다.

대우증권 김승우 인사부장은, 오랫동안 투자를 하여 키워놓은 인재를 다른 회사들이 채 가려고 한다면 어떠한 조처라도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대우증권은 유능한 직원들을 선발하여 국내외 대학에 위탁 교육시킨다. 이 가운데 5~6명은 시카고 선물거래소에서 개인당 백만달러씩 지불하고 실제 선물 거래를 하도록 했다. 국내 선물시장이 출범함에 따라 실전 경험을 가진 인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국투신 김법인 경영기획팀장은 “한 회사가 키워 놓은 인재를 곶감 빼먹듯 채간다면 상도덕상 문제가 있다. 게다가 스카우트 대상 인력들은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인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스카우트된 직원들이 회사의 영업 비밀을 경쟁 회사로 가져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한투자신탁 최병롱 기획부장은 “나가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고객 관리 카드와 포트폴리오(자산이나 투자 구성 내역) 같은 기업 정보까지 가지고 나간다”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투신사의 스카우트방지협정은 처음에 영업 비밀 유출을 막겠다는 동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각 업계의 속사정도 있다. 특히 조선업의 경우 업체들이 스카우트방지협정을 체결하게 된 데는 어쩔수 없는 사정이 있다. 94년 조선업이 대호황을 맞게 되자 대형 업체들이 도크를 새로 건설하며 대규모로 설비를 증설했다. 삼성중공업·현대중공업·한라중공업이 잇달아 경력 사원 공개 모집을 해 한진중공업 계열사인 코리아타코마는 설계 경력 사원의 15% 가량이 빠져나가 설계 능력이 마비 상태에 빠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조선업계는 스카우트방지협정을 맺게 되었다.

스카우트 관련 법·제도의 원시성이 제일 문제

프로 야구도 마찬가지이다. 각 팀 실력이 비슷하여 치열한 승부을 벌일 때 관중이 몰린다. 그런데 자본 동원력이 있는 어느 한 구단이 국내 최우수 투수들과 간판 타자들을 전부 몰고 간다면 우승이 뻔하기 때문에 경기장을 찾는 야구팬은 현격히 줄 것이다. 프로 야구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이 프로 야구 출범 이후 줄곧 드래프트 제도를 유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유망 선수들이 모두 일본이나 미국으로 스카우트되면 한국 프로 야구는 존립 기반이 없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우선 노조가 차별 대우라고 반발한다. 또 봉급 인상에도 한계가 있다. 대우증권 김승우 부장은 “우수한 펀드매니저나 증권분석가에게 연봉 6천만~7천만원까지는 줄 수 있다. 그런데 외국 증권사들은 10만~20만달러씩 연봉을 제시하며 데리고 간다”라고 말했다. 같은 증권사 내에서 투자분석가와 펀드매니저만 다른 직원들보다 3~4배 더 받는 것은 국내 증권사 정서로서는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와 같이 스카우트를 둘러싼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논란이 일 소지가 많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도입한 사용자단체의 자율 규제라고 하더라도 현행법에 위배되는 것은 분명하다. 업계가 처한 현실을 고려하면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는 준거가 되는 관계 법령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만 경쟁 회사의 영업 활동을 방해하거나 배제할 목적으로 행하는 부당 스카우트에 대한 규제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무엇이 부당이고 무엇이 타당인지 가릴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없으니 기업간 또는 노사간 대립과 갈등이 있게 된다.

일본이나 미국은 스카우트 관계 법령이 아주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스카우트 대상 사원이 소속 회사의 중대한 영업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와 사원이 가진 정보를 개발하는 데 회사가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따라 퇴직 후 경쟁 업체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 영업 비밀 개념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회사가 투자한 교육비를 엄밀히 산정하여 일정 기준에 부합하면 해당 직원은 재임 기간이나 퇴직 후 일정 기간 경쟁 회사에 취업할 수 없다. 또 근로자가 경쟁사에 취업함으로 말미암아 사용자가 입은 손해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퇴직 후 경쟁 회사 취업에 제한을 받는다.

국내에서는 공정거래위나 증권감독원 같은 관련 기관이 사례마다 그때그때 판단하여 조처한다. 따라서 일관성이 없고 관련 법규가 얽혀 있다. 그래서 사용자단체들은 상위법에 어긋나는 자체 규약으로 인력 수급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국내 경제는 산업구조 조정기에 들어갔다. 철강·자동차·조선 같은 중공업이 경제의 주력 산업 위치에서 물러나고 기술집약 산업인 반도체·정보통신·우주항공산업이 국내 산업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숙련된 기술자와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 같은 인재를 놓고 쟁탈전이 치열해질 것이다. 그런데 스카우트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법적 장치가 취약하면 기업간·노사간 갈등으로 인해 산업구조 조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소영 박사는 ‘스카우트 규제 약정의 정당성 판단 기준’이라는 소논문에서, 국내에서는 스카우트와 관련된 법규정이 상법상 이사급 이상에 대해서만 경쟁 회사 취업 제한이 있을 뿐이고 노동법에는 명문 규정이 없는 실정이므로 스카우트와 관련된 법적 분쟁이 증가할 것에 대비하여 관계 법령을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카우트나 근로계약 관계에 대한 명확한 입법은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간 자율 해결을 촉진할 준거가 될 수 있다.

또 스카우트 문제가 발생하거나 업종에 따라 특수 근로 계약 조건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적절하게 해결할 제도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스카우트 분쟁 해결을 법원에만 의존하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경비가 소요되고 원만한 해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사자간 조정을 통해 합의를 유도하거나 중재 판정을 내리는 분쟁 조정 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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