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소 배 째고 가져가”
  • 경기 화성·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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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양귀비 마을 습격’ 르포/재배 농민들, 배짱·오리발·읍소
양귀비 키운 거 다 압니다. 어디 있어요?” “거 참, 형사 양반. 있어야 드리죠. 사람 잘못 잡으셨어요.” 6월13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 사는 농민 신돈호씨(56)는 경기지방경찰청 소속 양귀비 단속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신씨는 경찰이 생사람 잡는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신씨네 집 마당에는 3∼4일 전 낫으로 줄기를 자른 것으로 보이는 양귀비 뿌리가 있었다. 경기지방경찰청 마약계 주경종 형사(45)는, 동료가 신씨와 언쟁하는 사이 창고를 뒤져 양귀비 100여 주를 찾아냈다. 형사들이 다그치자 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었다. “저기요, 제가 겁도 나고 그래서… 한 번만 봐 주세요.”

6월은 양귀비꽃이 피는 계절이다. 양귀비는 아편과 헤로인을 만드는 데 쓰는 두해살이 풀이다. 그러나 단속을 피해 교묘하게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민이 늘고 있어 경찰과 숨바꼭질이 벌어지곤 한다. 경기지방경찰청 마약계장 권영헌 경감은 “해마다 6월이면 양귀비를 단속하는데 특히 올해는 봄에 비가 많이 와서 양귀비가 풍년이다”라고 말했다.


이 날 마약계 김승태·주경종 조는 화성시 향남면 일대를 뒤졌다. 단속에 걸린 주민은 거의 대부분 신씨처럼 오리발을 내민다. 신돈호씨 옆집에 사는 신갑범씨(70)도 양귀비 20여 주를 키우다가 걸렸다. “바람에 씨가 날아왔다. 나는 모른다.” 전형적인 변명이다. 김승태 반장은 “양귀비씨는 바람에 날리지 않습니다. 왜 잡초는 뽑으면서 양귀비만 고스란히 남겼습니까?” 하고 반박했다. 형사들은 양귀비를 뿌리째 뽑아 압수했다. 적발된 농민은 확인서에 지장을 찍고 며칠 뒤 경찰서에 출두해야 한다. 20주가 넘으면 입건, 50주가 넘으면 구속 사항이지만 전문으로 재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할 때가 많다. 오리발을 내밀 수 없는 농민은 읍소형으로 나오기도 한다. 김용찬씨네 할머니(75)는 멀리서 형사들을 보고 부랴부랴 집 뒤뜰의 양귀비를 뽑다가 현장에서 적발되었다. 할머니는 형사들에게 불우한 가족사를 읊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심장이 뛰네. 어이구 나 죽네.” 같은 곳에서 양귀비를 재배하다가 적발된 이웃이 와서 “할머니 잡아가지 마세요. 돌아가실지도 몰라요”라고 사정한다. 형사들은 난처하기 짝이없다. 주형사는 “지금은 저렇게 남을 위하는 말을 하지만 나중에 벌금 나오면 ‘왜 우리만 잡았냐’라며 따진다. 가슴은 아프지만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벌금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100주 정도면 2백50만∼3백만 원 정도가 떨어진다. 단속반은 할머니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머니는 양귀비 수가 적어서 벌금 안 내도 될 겁니다”라며 겨우 달래서 일으켜 세웠다.

이 마을 박 아무개씨(64)는 고의성 여부가 헷갈리는 경우였다. 이 집에서 키우는 양귀비는 다른 집과 달리 꽃잎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었고, 관상용 식물들 틈에 나란히 심어져 있었다. 박씨는 “꽃이 이뻐서 키웠다. 꽃양귀비는 보통 양귀비하고 달라서 키워도 된다고 들었다”라고 사정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인근 주민이 몰려와 변호를 한다. 단속반은 “처지는 이해하지만 양귀비는 종류에 상관없이 마약 성분이 똑같다”라고 설명했다. 김승태 반장은 “단속 대상이 대부분 농촌의 가난한 노인들이어서 야박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 힘들다”라고 말했다.

눈치 빠른 농민들은 단속반이 뜬다는 소문을 듣고 미리 손을 쓰기도 했다. 집 주변에 양귀비꽃이 떨어진 흔적이 있는 한 농가를 조사했다. 주인은 “양귀비가 마당에 있었는데, 단속한다는 말 듣고 오늘 아침에 다 잘라서 소한테 먹였다. 소 배 째서 가져가라”고 버텼다. 방안에 양귀비가 남아 있을 것도 같지만 영장 없이 가택 수색을 할 수는 없었다. 단속반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단속반은 주민들로부터 제보를 받기도 한다. 이날 오후 우연히 만난 김 아무개 할머니(78)는 “해창리에 가면 흰 양귀비가 많지”라며 친절히 형사들에게 위치를 알려주었다. 할머니는 속 아플 때 양귀비를 먹으면 특효약이라며 예전에는 누구나 다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빨간 양귀비는 효과가 없어. 흰 양귀비가 진짜야.” 주민들 사이에서 양귀비 효능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다.

김승태·주경종 조는 이 날 성과가 좋았다. 모두 6건에 양귀비 4백40주를 적발했다. 이들은 100m 밖에서도 양귀비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베테랑이지만, 간혹 이틀 동안 마을을 뒤져도 허탕을 치는 일이 있다. 단속반이 모는 차 안 바닥은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차가 진입할 길이 없는 벽촌에는 자전거를 타고 간다. 경기지방경찰청은 6월3일 헬리콥터를 동원해 공중 정찰도 했다. 5월23일부터 시작한 특별단속은 6월30일까지 계속된다.

단속이 끝나면 압수한 양귀비는 지역 보건소에 넘긴다. 저녁이 되어 단속반이 화성보건소에 도착하자 유정애 예방의학계장이 “어, 또 오셨네. 정말 솜씨 좋으시군요”라며 반겼다. 유계장은 보건소 직원들도 양귀비 단속을 하는데 마약계 경찰처럼 많이 잡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단속반은 6월13일 하루에만 화성보건소에 세 번 다녀갔다. 보건소에 모아진 양귀비들은 수사가 끝난 후 검찰 입회 아래 남김없이 소각 처리된다. 경기지방경찰청의 경우 양귀비 재배 적발 건수는 2000년에 1백11건, 2001년 1백35건, 2002년 88건이었다. 지난해는 월드컵 기간과 겹쳐 단속을 쉬었다. 마약계장 권영헌 경감은 “올해는 적발 건수가 2백 건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늘어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대마초와 달리 양귀비는 허가를 내고 합법적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없다.


양귀비라는 이름은 당나라 현종 때 나라를 흔든 미인 양귀비처럼 꽃이 이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500년에 약으로 쓰인 기록이 있다. 열매 하나에 씨가 5천 개나 있고 자생력이 강해 쉽게 자란다. 줄기 끝에 달린 볼록한 열매를 칼로 흠집 내면 젖빛 액이 나오는데, 공기를 만나 산화하면 검은색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생아편이다. 동남아 마약지대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생산되는 헤로인도 양귀비가 원료이다.

그러면 구전되어 내려오는 ‘속 아플 때 양귀비가 좋다’는 속설은 사실일까? 양귀비의 주성분은 모르핀·코데인·파파베린 등의 알칼로이드다. 그 가운데 모르핀과 코데인은 위험한 마약이지만 파파베린은 진경 효과(복통 치료 효과)가 있는 좋은 성분이다. 제약사들은 파파베린만 따로 분리해 치료약을 제조하기도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마약과장은 “양귀비 자체를 대책 없이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다른 약을 쓸 수 없게 된다. 중독성이 강해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마약관리과 김남수씨는 “시중에 나도는 복통 약에 비해 나은 것이 전혀 없다. 특효약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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