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유별한 제사 문화 뜯어고치자”
  • 金恩男 기자 ()
  • 승인 2000.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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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일·이하천 씨, 도발적 문제 제기… “제례 근본 정신은 남녀 평등” 반론도
마침내 ‘제사 거부’이다. 가부장제의 심장을 찌르는 구호가 한국 사회에 등장해 새 천 년 처음 맞는 명절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돌팔매를 각오하고 나선 이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바다출판사)를 써서 지난해 ‘유교 논쟁’을 촉발했던 김경일 교수(42, 상명대·중문학)와 늦깎이 소설가 이하천씨(51).

이들이 등장하기 전에도 제사 비판론은 심심치 않게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것이 페미니즘 진영. 이들은 주로 ‘제사 준비는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면서 정작 제사상에서는 여성이 소외되는’ 불평등한 제사 형식을 물고늘어졌다. 지난해 추석을 계기로 명절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를 본격 시도한 한국여성민우회는 올해도 ‘웃어라, 명절! 2000년’이라는 제목으로 평등 명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제사 지낼 때 향 피워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향 피울 때마다 장손이나 아들만 찾나”라는 10대 소녀. “생전에 나를 무척 예뻐하셨던 외할아버지 제사 때 절을 하려는데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리셨다. ‘넌 여자니까 그런 거 하면 안돼!’ 순간 아버지가 미웠고 여자임이 한탄스러웠다”라는 30대 여성에 이르기까지 제사에서 느끼는 여성의 소외감은 나이와 혼인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지난해 민우회가 수집한 ‘생활 속의 성 차별’ 사례 2천40여 건 가운데 제1위가 ‘명절·제사상의 성 차별’이었다.

은나라 때 왕위 찬탈한 조갑의 ‘원죄’

그런데 김경일 교수와 이하천씨는 제사의 내용과 형식 모두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넘어선다. 두 사람이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정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김경일 교수. 그는 유교가 강조한 도덕이 ‘사람’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고 독화살을 날린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한 유교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제사, 곧 직계 혈족에 대한 제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400년께인 은나라 시절, 조갑이라는 왕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하면서부터이다. 갑골문 기록을 살펴보면 이전까지만 해도 은나라는 황하신·천신을 포함해 천지만물에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조갑은 이들 제사를 모두 폐하고 조상신 하나만을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자기 조상의 족보도 수정했다. 김교수는 이것이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고 평가한다. 곧 자기 조상이야말로 모든 토템과 샤머니즘적인 숭배 대상을 초월한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주변 부족에게 과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유교 문화 특유의 족보 만들기·족보 캐기·씨족 혈통 우월 의식 따위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그런가 하면 제사 문화는 출발부터가 남녀 불평등 요소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 김교수의 지적이다.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조상의 조(祖)라는 글씨는 제단을 상형화한 시(示)와 남성 성기를 상형화한 차(且)가 합쳐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남성 우월의 가부장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 전반부터 형성된 개념으로, 이같은 발생론적인 이유로 여성은 제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교수의 독설을 빌리자면, 제사는 ‘남성만의 축제이며, 남성이 사회의 모든 가치와 권력을 계승해 가고 있다는 그들만의 은밀한 축제’이다.

<나는 제사가 싫다>(이프)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최근 선보이며 제사 문제를 본격적인 사회 이슈로 제기한 이하천씨는 ‘호주제’와 ‘제사’라는 가부장제의 망령이 우리 사회를 중병에 빠뜨렸다고 진단한다. 그 또한 처음에는 다른 페미니스트처럼 여성에게 부당하게 강요되는 제사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38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결국 그는 남성 또한 잘못된 제사 제도의 피해자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에 따르면, 제사 제도는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에 젖줄을 대놓고 있지 못한 제도이다. 제사 제도는 궁극적으로 며느리 또는 어린 자식을 ‘한 인간’이 아니라 제사를 치러줄 사람이라는 ‘이익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 결과 양산된 것이 ‘미성숙한 어른’이다. 이씨는 여성을 바라보는 한국 남성의 눈빛에서 희생을 요구하는 ‘거지 근성’을 읽어낸다.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나라에 충성, 부모에게 효도’를 일방으로 강요하는 사회에서 ‘볼썽사납고, 우아하지 못하고, 인간의 창의성을 말살하는 거대한 음모’를 읽어낸다.

김경일 교수나 이하천씨의 이같은 주장에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을 표시하는 이도 적지 않다. 3대 종손이라는 최 아무개씨(32)는 ‘뿌리를 찾고 싶은 것은 인간 본성’이라며, 김교수나 이씨가 조상과 자손의 관계를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제사가 단순히 제의 기능을 넘어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며, 핵가족 현상이 심해지면서 일가친척끼리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리가 제사임을 역설했다.

고려 시대에는 딸도 친정 제사 지내

조남국 한국유교학회장(강원대 교수)은 두 사람이 유가의 기본 정신과 변질된 형식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교의 근본 정신은 남녀 평등에 있으며, <주자가례>에도 제사 과정에 여성이 동참해 같이 절할 것을 명시한 대목이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여성을 제사에서 배제하는 잘못된 풍속이 흘러들었다는 것이다.

최병철 유도회 사무부총장(청주대 교수)은 합리주의라는 서양의 잣대로 유교 문화를 재단한 것 자체가 오류라고 지적했다. ‘후왕이박래(厚往以薄來, 가는 사람에게 후하고 오는 사람에게 박하다)’라는 <중용>의 한 구절에서처럼 탄생보다는 죽음을 중시하는 것이 유교 문화의 특성이다. 이는 윗사람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이다. 임금이 궁에 종묘를 두고 선대 왕을 섬겼듯 부모는 집안에 사당을 두고 조상을 모시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산 사람을 교육했다는 것이 최교수의 설명이다.

사실 제사 형식만 놓고 따진다면 이들의 화해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서양식 합리성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시중지도(時中之道, 시대 변화에 맞추어 가는 도)’라는 유교의 기본 정신은 제도나 형식이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다.

당장 고려 시대에만 해도 딸이 친정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윤회 봉사’라 하여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제사를 주관하는 것도 가능했다. 당시에는 집이 아닌 절에서 제사를 지냈으므로, 승려가 의식을 주관하고 자식들은 불공을 드리는 비용만 부담하면 되었다. 이같은 제사 풍속에서는 아들이 없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딸이 죽은 뒤에는 외손주가 제사를 계승했다(<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확고한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제사는 철저하게 남성, 그 중에서도 장남 손으로 넘어갔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신분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제사가 더욱 폐쇄적인 형태로 굳어 갔다는 것이 문화인류학자 백귀순씨(외국어대 강사)의 지적이다.

곧 돈으로 벼슬을 사려는 사람이 늘면서 너도나도 족보를 정비하고, 문집을 간행하고, 제례를 성대하게 치러 명망 있는 집안의 자손임을 과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부계적인 문중 조직이 더욱 강화되어 장남에게 재산·가계를 물려 주는 제도가 정착했다.

임돈희 교수(동국대·사학)에 따르면, 제사가 상속 제도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은 한국·중국·일본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사회주의 이전 중국에서는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 주어야만 제사를 요구할 수 있었다. 이때 재산 균분 상속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제사 의무는 형제자매가 공동으로 졌다(고려 또한 아들딸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했다). 일본은 후계자 단독 상속이었다. 후계자 아닌 자식은 유산을 한푼도 상속할 수 없었다. 단 후계자로 차남이나 사위가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다면 시대 변화에 따라 제사 문화 또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최병철 교수의 지적이다. 그러나 아들딸이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게끔 가족법이 개정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제사 행태에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4∼5년 전만 해도 명절을 며칠 앞두면 요통·복통·두통, 신경·안면 마비, 급작스런 몸살·하혈 따위를 호소하는 여성이 병원 응급실에 무더기로 실려오곤 했다. 그들은 명절에 저항하는 자신의 억압된 심리가 이런 정신 신체 장애로 나타났다는 것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국내 최초로 ‘아줌마 클리닉’을 운영하는 프로이트 신경정신과 조은희 원장의 말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조원장에 따르면, 이제는 명절과 제사 문화가 여성에게 부당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국외자’들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는 이상 한국 사회는 머지 않아 ‘제사가 싫다’는 반란 부대를 대량 목도하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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