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장관 '양민학살 축소' 메모의 진상
  • 정희상 기자(hschung@e-sisa.co.kr)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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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민간연구원 퇴출 과정에서 축소 지시 메모 유출
개각을 앞두고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 좌불안석이다. 군 관련 악재가 잇달아 터져나오고, 시민단체가 해임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6·25대 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은폐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 문제를 조장관의 거취와 연결하려는 쪽은 전국 민간인학살 유족회와 진상 규명 운동을 벌여 온 민간 전문가들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원회 ·위원장 강정구 동국대 교수)는 이 사태를 계기로 조성태 장관을 퇴임시키라는 요구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7월 14일 조성태 장관이 국방군사연구소 박순찬 소장에게 지시한 사항을 담은 메모장이다. 당시 업무 보고를 하러 새로 취임한 조장관을 찾은 박소장은 '주민희생사건 연구계획'을 함께 보고했다. 이에 대해 조장관이 지시한 내용을 박소장이 메모지에 옮겼고, 이 메모지가 국방군사연구원들 사이에 나돌게 된 것이다. '장관언급' 및 '장관지시'라고 적힌 이 메모지를 <문화일보>가 처음 입수해 지난 7월 24일 ·25일자 신문에 잇달아 보도했다.

이 메모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제주도 문경 함평 영동 나주 사건 등은 군이 보유한 자료를 섭렵하고 차후 쟁점화 가능성이 있는 사건(남원 임실 고창 순창)은 손도 대지 말 것(현장 출장은 금지, 자료는 정리) △참전자의 증언을 청취, 사실 여부를 확인하되 주민과의 접촉은 안되며 현지 조사는 뇌관을 건드리고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격이니 안 하는게 좋겠다 △군의 최대 양보선은 양비론이다 △군이 잘못한 점이 있다면 인정하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인정할 것.

이같은 장관 지시 메모가 공개되자 전국 각지의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회와 시민 ·사회 단체가 발끈하고 일어섰다. 이들은 이 메모가 민족 화해와 탈냉전 시대를 거스르려는 조성태 장관의 의중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며 장관 해임운동에 나선것이다. 파문 확산을 우려한 국방부는 즉각 해명 자료를 내고, 조성태 장관이 민간인 학살 조사를 축소 은폐하도록 지시했다는 기사를 내보낸 <문화일보>를 상대로 5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발끈한 유족회 ·시민단체, 장관 해임 요구

국방부가 조성태 장관이 메모지에 담긴 내용을 지시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범정부 차원에서 실시해야 할 민간인학살 조사 사업을 군이 앞장서서 현장조사를 벌이은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시했다고 해명한다. 또 군의 최대 양보선이 양비론이라고 했다는 대목은 조장관이 직접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고 밝혔다. 당시 조장관은 군사 작전의 정당성과 군의 명예가 훼손되어서는 안되고 민간인 피해 주장을 간과해서도 안된다고 지시했는데 받아 적은 측(박 전소장)이 이를 임의로 양비론으로 표현했다고 해명한다. 국방부는 특히 지난해 12월29일과 30일에 각각 상이하게 나온 국방군사연구소의 '민간인 학살 관련 지역전사 연구 결과 보고' 내용을 조장관이 보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며, 조장관이 이를 고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한 <문화일보> 제목을 문제 삼아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처럼 국방부가 서둘러 불을 끄려고 언론사를 고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족과 관련 단체의 공세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장관 지시를 담은 메모 내용이 까발려진 상태에서 지시 의도가 달랐다는 국방부의 해명이 먹혀들지 않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이번 사태가 군대의 부끄러운 과거 청산을 둘러싸고 군사 연구원들과 군 수뇌부 사이의 견해 차이와 갈등에서 빚어졌다는 점을 확인했다. 배경에는 국방군사연구소 폐쇄 및 개편 파동이 자리잡고 있다. 국방군사연구소는 그동안 민간인 석 ·박사급 전문 인력 15명과 군 출신 연구원 5명을 합쳐 20명으로 운영되어 왔다. 특히 민간인 출신 연구원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군이 부끄러운 역사까지도 연구 대상으로 설정하려고 시도했고, 지난해 4월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이른바 '해원(解寃)사업' 추진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해원 사업이란 한국전쟁 전후에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 전쟁 50주년 사업의 하나로 진상을 조사한 뒤 위령 사업을 벌이자는 것이다.

바로 이 연구 제안이 지난해 7월14일 조성태 신임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되었다가 장관 지시사항 메모지 유출 사태를 부른 불씨가 된 것이다. 조장관의 지시 핵심은 이미 알려진 사건을 중심으로조사하고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민간 연구원들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민간 연구원들은 이 지시를 사실상 사건 조사를 축소하라는 압력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 국방부도 전국적인 해원사업은 검토만 했을 뿐 실행하지 않았다고 밝혀 조장관이 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알수 있다. 다만 지난 10년간 <시사저널>이 관련 증거와 증인을 추적해 잇달아 보도해온 문경 ·함평 ·산청 ·함양 ·영동(노근리) ·나주 학살사건은 이미 공론화했기 때문에 국방부가 사실상 실체를 인정하고 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지난해 가을 노근리 사건이 공론화하자 국방부는 민간인 학살 실태 조사와 대응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인 학살 사건 30여 건을 우선 연구 대상으로 잡은 연구소는 모든 민간인 학살 사건을 A급부터 D급까지 넷으로 분류했다. 여기에는 한국 군경이 저지른 학살 17건, 미군이 가해자인 학살 60건, 베트남전 학살 22던, 캐나다 군대가 저지른 학살 1건이 포함되어 있다.
신임 연구소장, 연구원에 폭언 ·폭행

그러나 문제는 올 들어 국방부가 연구소를 폐지하고 현역 군인이 중심이 된 군사편찬연구소를 새로 설립하기로 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민간 연구원들은 지난 1월 연구소 운영 비리 시정과 연구소 개혁 요구를 담은 건의서를 장관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국방군사연구소 해체를 강행했고, 민간 연구원들은 이에 대해 개혁적 연구진을 퇴출시키려는 음모라며 연구소 해체 취소 처분 청구 소송을 냈다. 지난 5월에는 새로 취임한 조지연 연구소장(예비역 소장)이 회식 석상에서 책임연구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했다가 서울지검에 고소되는 등 크고 작은 잡음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최근 국방부는 민간 연구원들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내고 오는 9월부터 국방부 직할 기관인 군사편찬연구소를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노근리사건과 같은 과거 유사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 기능을 보완하고, 현역 군인을 중심으로 해서 민간인 학살 사건 조사 업무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방부의 이런 처사는 퇴출되는 민간 연구원들에게 양민 학살 사건 조사에 대한 축소 왜곡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현역 군인을 중심으로 과거 일부 군 선배가 저지른 과오를 연구하도록 한다는 점이 연구의 신뢰성과 객관성을 의심케 하는 처사나 다름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지난 6월 말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연구 업무에 종사할 군무원특별채용시험 계획을 공고했는데, 일반적인 연구소의 연구원 자격 기준과 달리 전문대 졸업자에게 5급 기준까지 채용 자격을 부여했다. 석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면서도 퇴직을 강요받은 현재의 민간연구원들은 전문성이 없는 군 출신 중심의 연구소가 들어서면 민간인 학살 진실을 규명하기보다는 국방부의 입맛에 맞는 조사만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학술단체협의회도 최근 국방군사연구소 해체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민간인 학살 사건 연구와 조사 방향을 둘러싸고 국방부 내 민간 전문 연구진과 국방부장관 등 군 수뇌부의 근본적인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말 안듣는 자기네를 몰아내고 학살 가해자측 입맛에 맞는 연구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군출신 중심의 새로운 직할 연구소를 만든다는 민간 연구원들의 항변에 일리가 있는 셈이다. 범국민위원회 강정구 교수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는 더 이상 가해 당사자인 국방부에 맡길 것 아니라 정부와 민간 전문가 단체가 중심이 되고 국방부는 자료 제출 등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곤경에 처한 조성태 국방부장관은 이 문제를 더 이상 미봉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조장관은 비록 은폐 축소를 지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지만 그의 지시를 담은 메모 내용으로 인해 전국에서 상처를 쓰다듬고 살아가는 수백만 피해 유족은 또 한번의 상처를 입었다. 따라서 공직자인 조장관이 이번 사건으로 실추한 명예를 되찾고 싶다면 문건을 폭로한 언론사의 보도 내용 일부를 문제 삼아 고소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자기가 축소 은폐를 지시하지 않았다는 변명 대신 모든 양민 학살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군대로 거듭나도록 하라고 다시금 지시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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