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레미콘 업자 유착?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1.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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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필 연합회장 형제, 동교동 실세와 '절친'…
검찰 뒤늦게 수사해 '의혹' 증폭


김중권 대표보다 더 센 사람이다." 지난 7월30일 민주당사를 방문한 박석운 민중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레미콘 업주의 불법 행위를 검찰이 수사하지 않은 배경에 여권 실세가 개입했음을 암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날 박위원장을 비롯한 홍근수 목사·조희연 교수·김칠준 변호사 등 시민·사회 단체 대표들은 김중권 민주당 대표를 만나 검찰과 정부·여당의 미온적인 대처를 비판했다. 김칠준 변호사는 "부당 노동 행위를 일삼는 사업주는 처벌하지 않고 노동자만 처벌한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법집행이 형평성에 어긋난 것은 여권 실세가 레미콘 업주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동교동계 거물 외유하자 유재필 소환




이같은 주장에 김중권 대표는 "여권 실세가 누구냐, 나냐?"라며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맞섰다. 하지만 시민단체 대표들은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할 경우 여권 실세가 누구인지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연인가, 준비된 순서인가? 시민단체가 비호 세력으로 지목한 동교동계 거물급 인사가 한 달 일정으로 외유를 떠나자마자, 검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지난 8월3일 검찰은 시민단체가 여권 실세와 통하는 인물이라고 지목한 유재필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 회장(70)을 전격 소환해 조사했다.


검찰의 태도가 이처럼 달라지자 오히려 시민·사회 단체는 여권 실세가 개입했다는 심증을 굳히는 분위기다. 검찰의 수사 착수가 유회장과 여권 실세 밀착설에 종지부를 찍기는커녕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로부터 권력과 유착했다는 의혹을 받는 유재필 회장은 어떤 인물인가. 중견 레미콘 업계를 이끌고 있는 유회장의 사업 기반은 제과업이었다. 그는 1960년대 초반 목포에서 제과 사업을 시작했고, 1969년 서울에서 ○제과를 창업했다. ○제과는 건빵을 만들어 군대에 납품하면서 성장했다. 제과 사업으로 재미를 본 유씨는 1984년부터 레미콘 업계에 뛰어들었다. 때마침 불어닥친 건설 붐을 타고 유씨 회사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는 인천 부천 수원 광주 천안 등에 레미콘 회사 8개를 잇달아 세웠다. ○기업은 1997년에는 부천·김포 지역 케이블 TV 사업자로 선정되었고, 벤처 바람을 타고 정보통신 분야에까지 진출하며 승승장구했다. 1994년 중소 레미콘 업체의 연합체인 한국레미콘공업협동조합연합회가 출범하면서 회장을 맡은 유씨는 지금까지 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소기업인으로 일관한 유회장이 대기업 오너 못지 않은 정경 유착의 구설에 휘말린 것은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신승남 검찰총장과 동향이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유회장과 실세의 밀착설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레미콘연합회 관계자는 "동향으로 따지면 모든 사람이 실세와 통하겠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전용학 대변인도 이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유회장과 여권의 관계에는 의구심을 가질 만한 구석이 많다. 유회장은 1999년 4월 새정치국민회의 경제대책위원회 운영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집권 초반기인 1998년 3월 출범한 경제대책위를 활성화하기 위해 경제계 인사를 수혈하는 과정에서 유회장도 포함된 것이다. 그는 경제대책위원회 운영위원으로서 경제 대책 수립에 자문하고, 기업과 정부를 잇는 역할을 맡았다.


유회장뿐 아니라 유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인 유 아무개씨(65) 역시 동교동계와 인연이 남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 때 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인천 남동 갑에 출마해 당시 신한국당 이윤성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유씨는 고향인 전남 영암에서 민주한국당 공천을 받아 11대 국회의원(1981∼1985년)으로 당선되었던 전직 국회의원이다. 1985년 12대 총선 때는 선거 3일 전에 귀국한 DJ가 몰고온 신민당 돌풍으로 민한당 출신인 그는 고배를 마셨고, 13대 때는 평민당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동생이 야당 생활을 하면 사업에 지장이 있다는 유회장의 만류로 중도 포기했다. 유씨는 1990년 꼬마 민주당을 거쳐 1996년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0여 년 동안 정계를 떠나 ○기업 사장을 지낸 유씨가 15대 공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동교동계와의 인연 덕분이었다. 유씨는 출마 전에 발간한 자서전 〈정치가와 정치인 그리고 정치꾼〉 76쪽에서 자신이 동교동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권노갑·한화갑·김옥두 등 가신 그룹과 형제처럼 지내왔다고 회고했다.


"노갑이 형님이 내정자 따돌리고 나를 공천했다"




지난 8월3일 기자와 만난 유씨는 "권노갑씨하고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다. 1971년부터 동교동계 인사들과 교류했다"라고 밝혔다. 1970년대부터 약품 수입상을 운영하면서 물심 양면으로 배고픈 야당을 도왔다는 것이다. 유씨는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려는 듯 DJ의 친필 휘호를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유씨는 "동교동 인사들과 이런 인연으로, 15대 공천을 받을 때도 다른 사람이 내정되었는데 노갑이 형님이 뒤집어서 나를 추천했다"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정계를 떠났다는 유씨는 지금도 아태재단 운영위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씨는 "이번 형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본인이 나서면 더 난처해질 것 같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회장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왔음은 그동안 진행된 레미콘 노사 분규 처리 과정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지난해 9월19일 레미콘 운전기사들은 전국건설운송노조를 설립해 영등포구청장으로부터 노동조합 설립 신고필증을 교부받았다. 하지만 사측은 노조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입 차주인 운전기사는 사업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노동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측은 이같은 논리로 대화를 거부한 채 노조에 가입한 운전기사들을 해고했다.


사측의 강경몰이에 건설운송노조는 지난 4월10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서울 여의도에 레미콘 차량을 세워 놓고, 알몸 시위· 한강 뗏목 시위·전국 자전거 일주 시위·집단 단식 등 그야말로 온몸으로 맞섰다. 그러자 경찰의 강경 진압이 이어졌다. 지난 6월19일 경찰은 '동대문 서장 폭행 사건'을 계기로 노동계를 압박하면서 시범 사례로 농성 중인 레미콘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했다. 경찰은 도끼와 해머로 차량을 부수고 조합원을 연행했다. 이 날 장문기 건설운송노동조합 위원장 등 3명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노동계뿐 아니라 참여연대·경실련·민변 등 시민·사회 단체까지 가세했다.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운전기사들은 인천·서울 등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제기했다. 각 지방노동위원회는 한결같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근로자로 인정했다. 중앙노동위원회도 노동쟁의 상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회사들의 잘못이 크다고 지적하고 사측에 성실한 대화를 나누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사측은 이같은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유회장의 ○기업은 레미콘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노동조합 활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천지방법원에 냈지만, 재판부 역시 레미콘 기사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법원은 레미콘 운전기사들이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면서 노동조합 활동 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그런데도 사측은 요지부동이었다.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보다 못한 노동부마저 지난 6월 레미콘 업주의 불성실 교섭 등 부당노동행위 59건을 적발해 해당 사업주를 기소하라고 검찰에 넘겼다. 6월2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상임위원회에 출석한 김호진 노동부장관은 유재필 회장을 지목하며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어찌된 일인지 검찰은 그로부터 한 달 동안이나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이같은 검찰의 이해하기 힘든 늑장 수사는 권력 비호설을 부채질했고, 유재필 회장은 최근에야 검찰에 소환되었다. 시민·사회 단체는 유회장을 사법 처리 해야만 권력 유착설을 불식할 수 있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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